이 멋진 세상 속으로 325

페르시아 문명의 시원을 찾아서 - 파사르가데, 낙쉐 로스탐, 페르세폴리스

'나는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이 왕국을 세웠고 세계를 점령했다. 그러나 후일 이 땅이 다른 사람에게 점령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대 또한 얼마 안 가 다른 사람에게 이 땅을 점령당할 것이다. 그러니 내 무덤과 비문을 훼손하지 말라' 기원전 330년, 동방원정의 알렉산더 대군에게 패한 페르시아. 그 알렉산더가 페르세폴리스를 철저히 짓밟고 이 파사르가데까지 왔을 때 이 비문을 읽은 그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왕의 무덤을 덮어 주었답니다. 그 일화가 전해지는 곳, 키루스 왕의 무덤입니다. 두 영웅의 인간됨을 알려주는 장면이었지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일부로 동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 서로는 사하라 사막, 북으로 러시아에 남으로는 에티오피아까지 그 세력을 넓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대제국, 페르시..

이란 야즈드 - 알리와 보미의 추억

이스파한을 떠나 완행버스를 타고 도착한 야즈드, 역시 카비르 사막에 둘러 싸인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밤에는 중심광장의 야경을 보러 나갔습니다. 불빛 속에 아미르 '차크마크 콤플렉스' 건물과 'Ashura'에 쓰이는 거대한 수레, '나클레'가 보입니다. 서기 680년에 있었던 시아파 지도자 '후세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행사, '아슈라'를 치른 직후라서 거리는 온통 그를 추모하는 글과 그림으로 도배가 된 듯했지요. 이 기간에 야즈드의 남자들은 검은 옷에 이 나클레를 메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사람들과 그 슬픔을 나누고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면서 후세인의 순교 고통을 체험하기도 한답니다. 예언자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였던 '무함마드'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이슬람 세계는 '시아(Shia)파'와 '수니(Sun..

세상의 반, 이스파한 - 2

이스파한의 3일째, 숙소에서 걸어 나와 하쉿베헤쉿 궁전까지 걸었습니다. 궁전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지만 거기에 딸린 공원은 무료. 퇴색한 채로 손질이 안 된 궁전에는 들어가지 않고 수로와 분수가 있는, 나무가 울창한 정원 속을 산책하였습니다. 여기는 이스파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공원이랍니다. 다시 이맘광장으로 나갑니다. 아래에 보이는 '자메 마스지드'는 서아시아를 지배한 각 제국의 건축양식이 혼재한 모스크이지만 남쪽 이완의 입구는 양쪽 첨탑의 섬세한 채색 타일에 반 원형의 이란 양식이고 '술탄 올제이투'의 기도실 안에 있는 이 미흐랍(메카 방향을 표시한 벽감)과 그 옆의 민바르(계단 모양의 설교대)는 모두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작품으로 이렇게 섬세한 코란 비문과 꽃문양의 부조로 세상에서 가장 아..

세상의 반, 이스파한 - 1

200여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등장한 16세기의 사파비 왕조는 명실공히 페르시아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됩니다. 그 왕조의 수도였던 오아시스 도시, 이스파한은 그 당시 7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로 막강한 국력과 경제적인 번영 속에서 많은 유적을 남깁니다. 이스파한에 있는 대부분 건물은 사파비 왕조 최고의 번영기인 압바스 왕 시기에 지어졌답니다. 이스파한에서의 첫날 관광은 이맘 광장으로 나가는 길목의 체헬소툰 궁전으로 시작합니다. 체헬소툰은 '40개의 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목조건물로 테라스에 있는 20개의 나무 기둥이 연못에 그림자 되어 비치면 모두 40개로 보인다 해서 붙어진 이름이랍니다. 이란인들이 좋아하는 분수가 있는 정원에 건물 내부를 장식한 화려한 거울 모..

이란의 공예 마을, 카샨

테헤란의 마지막 일정,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보석박물관'을 돌아보고 곧 카샨으로 출발했습니다. '보석박물관'은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그것도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만 공개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테헤란의 일정을 조정해야 했네요. 현지인의 열 배가 되는 15000 토만을 내고 가방과 카메라를 보관한 다음 보안 검색대 한 번, 금속 탐지기 두 번을 거쳐 돌아본 보석박물관은 화려함의 극치! 경비원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관람객들이 조금이라도 보석에 가까이 다가서면 곧 경고벨이 울리는 삼엄한 곳이었지요. 팔레비 왕은 그런 어마어마한 보석이 눈에 밟혀 어찌 죽었을까요? 테르미널 주눕까지 데려다준 택시기사가 카샨 행 버스표를 파는 창구가 17번이라 알려 주었기 때문에 도착하면서 바로 차표 구..

이란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 마술레와 아비야네

이란에는 이란 문화재청이 추천하는 페스세폴리스, 이스파한 등의 10대 명소에 마술레와 아비야네, 두 개의 아름다운 시골마을이 있습니다. 마술레는 이란 서북부 길란 지방, 산기슭에 일궈진 오랜 역사의 전통마을로 테헤란에서 직접 가는 버스가 없어 우선 래싯 행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테헤란 테르미널 가릅-서부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사막 풍경이 끝나고 초록빛 들판이 보입니다. 4시간 30분 걸려 도착한 래싯에서는 마술레 왕복과 3시간의 대기 시간 포함해서 9만 토만, 약 27달러 정도에 택시를 대절했지요. 석유 생산국답게 이란은 교통비가 쌌기 때문에 지방과 지방을 이동할 때에는 주로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우리 일행, 5명도 한 택시에 모두 태워 주었으니 교통비는 더 많이 절약되었고요. ㅎ..

이란의 수도, 테헤란

작년 가을, 이란과 이스라엘, 요르단에 다녀왔습니다. 2년 전, 남부 터키의 요새도시인 마르딘의 찻집에 앉아 멀리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내려다보면서 다음 여행은 그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 옛 페르시아 영광을 가진 이란에 가자고 일행들과 의기투합했었지요. 그 세 명과 같이 2013년 5월 30일 출발, 7월 1일에 돌아온 33일 일정이었습니다. 그중 이란은 미국이 몇 나라에 규정해 놓은 '악의 축'. 많은 사람들이 하필이면 왜 거기냐고 말리던 곳이었네요. 남한의 16 배 정도로 넓은 땅, 이란은 이란족(페르시아인)이 과반수, 사용언어는 페르시아어(파르시)로 다른 중동국가와 비교할 때 그 태생과 인종 구성, 언어가 다릅니다. 그 옛날,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중 인도-유럽계 아리안의 일부가 이란 고원으로 이동..

산따 끌라라 - '20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체 게바라'

산따 끌라라에 왔습니다. 뜨리니다드에 도착하자마자 터미널에서 산따 끌라라 행 버스표를 예약. 이틀 후 오후 3시에 출발, 3시간 걸려 도착했지요. 길가에는 야자수 사이로 넓은 평원에 사탕수수밭이 이어집니다. 터미널에서 여행자를 픽업 나온 까사 주인을 만나 그의 차로 비달 광장을 거쳐 가정집 2층에 있는 게스트룸에 들어왔습니다. 비달 광장에는 시청과 혁명전쟁의 총알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호텔 '산따 끌라라 리브레'하며 고풍스러운 까리다드 극장 등 이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고 주변에는 햇빛을 즐기는 쿠바인들로 가득했습니다. 광장 한 가운데에 중남미 소깔로 건축의 특징인 정자도 보이네요. 나름 평화로운 풍경이었지요.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체 게바라를 만나는 일. 버스가 산따 끌라라로 들어서자 일..

뜨리니다드 - 노예 감시탑을 보며

아침 일찍 뜨리니다드에 가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도착한 아바나의 시외버스 정거장은 터미널임을 알리는 간판도 없고 작은 대합실 안에는 행선지와 시간표, 요금표에 대한 안내도 없었지요. 서비스 개념은 전혀 없는 듯했네요. 별도의 매표 창구도 없이 한쪽의 책상에서 매표원 여자는 예약된 사람에게 먼저 표를 주면서 명부에 없는 사람에게는 기다리라 했지요. 전날, 민박집 안주인에게 전화예약을 부탁했는데 그분이 잊었는지 우리 이름은 없었네요.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야 겨우 뒷자리에 탑승하게 된 뜨리니다드 행 버스(현지 이름은 비아술) 요금은 25 CUC. 8시 30분 출발, 6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 1시에 가는 버스까지 하루 2회 운행됩니다. 중간에 한 번 휴게소를 거치며 입구에 이 도시의 상징, 노란색의 산 프란시..

쿠바와 헤밍웨이

쿠바와 함께 하는 또 하나의 인물, 누구보다도 쿠바를 사랑했던 작가, 헤밍웨이(1899~1961)를 만났습니다. 그의 동상이 있는 아바나의 근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찾아갔던 '꼬히마르'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 어부가 실제 살았던 어촌이지요. 84일의 기다림 끝에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3일간의 사투를 겪으며 뱃전에 매달고 돌아오지만 중간에 상어를 만나면서 겨우 남은 뼈만 가지고 귀항합니다. 작은 광장에서 그는, 그가 사랑했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워 놓은 탄생 63주년을 기리는 기념비도 있었구요. 20여 년 간 쿠바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헤밍웨이는 아바나 곳곳에 그 삶의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