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뜨리니다드에 가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도착한 아바나의 시외버스 정거장은
터미널임을 알리는 간판도 없고 작은 대합실 안에는 행선지와 시간표, 요금표에 대한 안내도 없었지요.
서비스 개념은 전혀 없는 듯했네요.
별도의 매표 창구도 없이 한쪽의 책상에서 매표원 여자는 예약된 사람에게 먼저 표를 주면서
명부에 없는 사람에게는 기다리라 했지요.
전날, 민박집 안주인에게 전화예약을 부탁했는데 그분이 잊었는지 우리 이름은 없었네요.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야 겨우 뒷자리에 탑승하게 된 뜨리니다드 행 버스(현지 이름은 비아술) 요금은 25 CUC.
8시 30분 출발, 6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 1시에 가는 버스까지 하루 2회 운행됩니다.
중간에 한 번 휴게소를 거치며
입구에 이 도시의 상징, 노란색의 산 프란시스꼬 성당이 있는 트리니다드에 들어섰습니다.
터미널에 버스, 비아술이 도착할 무렵이 되면 까사의 주인들이 나와서 여행자를 기다립니다.
그중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따라 간 집이 우리의 2박 3일 숙소.
정부에서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허가해 주는 민박집, '까사' 표지가 문 앞에 붙어 있습니다.
현지 여행사에 투어 신청, 앙헤니오스 계곡(Valle de los Ingenios)에 다녀왔습니다.
옛 시절의 증기 기관차를 이용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 기관차들은 레일에 문제가 있어 운행이 되지 않는다 하더군요.
앙헤니오스 계곡은 뜨리니다드 동쪽에 있는, 50여 개의 사탕수수 농장이 있던 곳으로
두 번의 독립전쟁과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농장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당시 쿠바 최고의 부자였던 마나까 이스나가가 1795년에 지은 집은 아직 남아 있어
이 도시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입구의 수공예품을 파는 노점을 지나
색색의 부겐빌리아꽃과
전통 복장의 인형들을 보면서
들어간 그의 집은
이제 여행자를 위한 식당이 되었고
내부에는 그 시절을 알 수 있는 몇 개의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그림에서 본
높이 44m의 노예 감시탑에서는 눈 아래 넓은 농장이 내려다 보였지요.
흑인 노예의 처절했던 삶으로 가득했던 들판은 이제 평화로웠습니다.
노예들의 집터는 이제 흔적만 남아 있고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어내던 작업장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설탕, 커피, 차, 면직물, 금, 은, 구리며 향신료 등등,
오늘날, 서양의 富의 원천이 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의 막대했던 착취가
마음을 씁쓸하게 만듭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누비며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와
질병과 향수 속에서 죽을 때까지 중노동을 해야 했던, 절망의 현장을 보는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주변 마을에도 작은 감시탑이 남아 있습니다.
뜨리니다드 시내,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파스텔 톤의 화사한 건물은
강렬한 쿠바의 햇살 속에서 많이 바랬지만
창과 베란다 난간의 섬세한 장식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반질반질 닳은 돌길을 걸어 천천히 이 작은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시립 역사박물관을 돌아보고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이 도시의 상징인 산 프란시스꼬 성당이 보입니다.
그 근처에서 쿠바 국기가 그려진 가죽모자에 시가를 입에 문 멋쟁이 쿠바 아저씨도 한 장 찍으며
가게에서 시가를 입에 문, 멋쟁이 흑인 아가씨 인형도 샀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이 지역 특산인 바닷가재 요리를 먹고
술집에서는 또 하나의 특산인 달콤한 럼 칵테일, '깐찬차라'도 마시면서
노예 감시탑과 사탕수수가 그려진, 이제는 전시용이 된 증기기관차 앞에서 한 장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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