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중남미 7개국 24

산따 끌라라 - '20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체 게바라'

산따 끌라라에 왔습니다. 뜨리니다드에 도착하자마자 터미널에서 산따 끌라라 행 버스표를 예약. 이틀 후 오후 3시에 출발, 3시간 걸려 도착했지요. 길가에는 야자수 사이로 넓은 평원에 사탕수수밭이 이어집니다. 터미널에서 여행자를 픽업 나온 까사 주인을 만나 그의 차로 비달 광장을 거쳐 가정집 2층에 있는 게스트룸에 들어왔습니다. 비달 광장에는 시청과 혁명전쟁의 총알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호텔 '산따 끌라라 리브레'하며 고풍스러운 까리다드 극장 등 이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고 주변에는 햇빛을 즐기는 쿠바인들로 가득했습니다. 광장 한 가운데에 중남미 소깔로 건축의 특징인 정자도 보이네요. 나름 평화로운 풍경이었지요.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체 게바라를 만나는 일. 버스가 산따 끌라라로 들어서자 일..

뜨리니다드 - 노예 감시탑을 보며

아침 일찍 뜨리니다드에 가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도착한 아바나의 시외버스 정거장은 터미널임을 알리는 간판도 없고 작은 대합실 안에는 행선지와 시간표, 요금표에 대한 안내도 없었지요. 서비스 개념은 전혀 없는 듯했네요. 별도의 매표 창구도 없이 한쪽의 책상에서 매표원 여자는 예약된 사람에게 먼저 표를 주면서 명부에 없는 사람에게는 기다리라 했지요. 전날, 민박집 안주인에게 전화예약을 부탁했는데 그분이 잊었는지 우리 이름은 없었네요.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야 겨우 뒷자리에 탑승하게 된 뜨리니다드 행 버스(현지 이름은 비아술) 요금은 25 CUC. 8시 30분 출발, 6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 1시에 가는 버스까지 하루 2회 운행됩니다. 중간에 한 번 휴게소를 거치며 입구에 이 도시의 상징, 노란색의 산 프란시..

쿠바와 헤밍웨이

쿠바와 함께 하는 또 하나의 인물, 누구보다도 쿠바를 사랑했던 작가, 헤밍웨이(1899~1961)를 만났습니다. 그의 동상이 있는 아바나의 근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찾아갔던 '꼬히마르'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 어부가 실제 살았던 어촌이지요. 84일의 기다림 끝에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3일간의 사투를 겪으며 뱃전에 매달고 돌아오지만 중간에 상어를 만나면서 겨우 남은 뼈만 가지고 귀항합니다. 작은 광장에서 그는, 그가 사랑했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워 놓은 탄생 63주년을 기리는 기념비도 있었구요. 20여 년 간 쿠바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헤밍웨이는 아바나 곳곳에 그 삶의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중남미 여행의 끝, 쿠바입니다.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래, 노예가 된 원주민들이 전염병과 고된 노동 끝에 거의 전멸하면서 대체 노동력으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과 그 후손, 백인과의 혼혈인 물라토들이 전체 인구의 50%가 넘는 나라,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경제봉쇄, 다른 중남미 국가와의 외교단절 등으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나라입니다. 여권에 쿠바 방문 출입국 스탬프가 찍히면 미국에 입국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자들처럼 25달러를 내고 별도의 쿠바 비자 겸 여행자 카드를 구입했습니다. 15시 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Cubana'를 타려고 깐꾼 공항에 3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보딩패스를 받으면서 들은 말은 3시간 출발 지연. 창구직원은 놀라는 나에게 어제는 12..

깐꾼의 이슬라 무하레스

호화로운 호텔에 둘러싸인 깐꾼의 세련된 바다에서 한적하고 편안한 이슬라 무하레스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깐꾼에서 11km 떨어져 있는 작은 섬으로 아직은 소박하고 조용한 휴양지. 한국을 떠나기 전 이곳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었지요. 깐꾼의 이슬라 무하레스 행 선착장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페리를 타야 합니다. 항구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는 곧 골프 카트를 빌려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작은 해변은 아름다웠고 카리브의 물빛은 파랗고 투명했지요. 멀리 보이는 화려한 깐꾼보다 이곳이 더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섬의 서쪽, 얕은 해변에서는 가족단위의 현지인들이 음식을 해 먹거나 선탠을 하면서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중심가, 이달고 거리에는 아담한 성당도 있었고 깜찍한, 이렇게 작은 카페도 있었지요. 우..

깐꾼과 치첸잇싸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해변과 최고 시설의 호텔, 화려한 쇼핑시설을 갖춘 세계적인 리조트, 깐꾼입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신혼여행지, 은퇴자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이 깐꾼이라 했지요. 햇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바다 물빛도 좋았고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의 풍경도 아름다웠습니다. 스노클링과 다이빙, 요트 투어와 놀이 공원, 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쇼까지 없는 게 없다는 휴양도시였지만 바다를 향하여 건설한 거대한 호텔들이 마치 벽처럼 해변을 막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해변은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전용공간이었네요. 현지 투어로 고대 마야 왕국의 대도시였던 '치첸잇사'로 가는 길에서는 중간 휴게소, '꾸꿀깐의 피라미드, 엘 까스티요'를 보여주는 화려한 광고판이 눈을 끌었..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에서 - 2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는 1994년 싸빠띠스따 봉기가 시작되었던 중심지로 스페인 후손과 지역 인디언 사이, 갈등의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반군이 정글로 도망하며 종전 협상이 체결된 후에도 계속 정부군이 주둔,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공항 검색도 심해서 뚜껑이 있는 컵이며 보온병도 모두 압수당했지요. 그런 것들까지 체크를 하는 곳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온 해발 2300m의 이 도시는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좋았습니다. 아침부터 소깔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마침 오늘은 이 마을의 장날. 거리와 시장에서는 전형적인 인디오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키에 검은 피부와 머리카락,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풍성하고 화려한 스커트를 입은 인디오 여자들은 영혼을..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에서 - 1

마야의 유적지인 와하까, 빨렌께, 올멕과 싸보떽, 떼오띠우와깐과 믹스떽의 문명이 겹쳐있는 몬테알반, 해양도시 베라크루스와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문명이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도시, 할라빠, 카리브해에 떠 있는 작은 섬, 꼬수멜 애니 깽의 슬픔이 전하는 메리다 들은 지난번의 방문에 거친 도시였지만 나를 멕시코로 이끈 도시, 치아빠스 주의 산 끄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는 그 당시 정부 반군, EZLN(에헤르씨또 싸빠띠스따민족해방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곳이었습니다. 권력과 주 자원을 소수의 부자로부터 가난한 다수에게 재분배한다는 '싸빠띠스따혁명군'은 이제 정부군에게 쫓겨 정글로 숨었다네요. 떨어진 체력으로는 멕시코 시티에서 출발하는 14시간의 버스 이동이 벅차서 한..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와 떼오띠우아깐

인류학박물관에서 지하철을 타고 소깔로까지 이동, 광장 주변의 성당과 대통령궁을 돌았습니다. 모두 11개 노선의 지하철은 환승 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하기 편했지요.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했던 멕시코시티가 10년이 지난 지금은 지하철에서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네요. 대성당은 식민지배자들이 마지막 고대 문명인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태양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여러 차례의 지진에 파손되면서 계속 보수 중이었습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의 건물 중 하나인 국립궁전도 역시 보수 중. 아스텍의 목떼수마 2세 궁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세운 이 총독부 건물은 지금 대통령의 집무실과 몇 개의 정부 부처로 사용되면서 별다른 검색 없이 여권을 제시하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멕시코, 멕시코 시티의 국립인류학 박물관

26일간의 남미 단체배낭 투어를 마치고 도착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그동안 여행을 같이 했던 일행들과 헤어진 후 남편과 둘이 항공 이동,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들어왔습니다. 멕시코는 한반도의 9배인 면적에 60%의 메스띠소와 30%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이 땅에는 기원전 1200년 경부터 올멕, 떼오띠오아깐, 똘떽, 마야, 아스텍 등의 고대 문명이 이어졌지만 16세기부터는 300년에 걸쳐 침략자,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습니다. 1821년 독립 후에는 미국과 영토 전쟁이 벌어지면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땅을 빼앗겼고 거기에 뉴 멕시코와 애리조나 등을 미국에 헐값에 팔아 넘기면서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요. 자유주의적인 개혁, Reforma의 시대가 열리면서도 계속된 내전과 권력 다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