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중구의 관광안내도를 보면서
먼저 '자유공원' 탐방에 나섰습니다.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으로
1888년 일본, 청국,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萬國之界’를 형성하면서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응봉산에 조성한 이후
각국 거류지 철폐로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로 이관될 때는 '서공원'으로,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
1957년 10월 3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부터는 '자유공원'으로 부르게 됩니다.
1897년에 조성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9년이 앞섰다네요.
광장에서는 월미도 일대가 내려다보입니다.
'1950년 12월, 3000여 명의 인천 학생들이 축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부산까지 이동,
해병대와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200여 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가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우리는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여기에 기념탑을 세운다.'는 안내판의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과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도 있습니다.
인천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으로 5m 높이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설치하고 그의 업적을 기렸답니다.
그 옆 작은 동판에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을 새긴 그림과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미 해군,
그리고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하여 우리들 도와주었던 여러 나라들에 대한 감사도 기록을 해 놓았네요.
미국 워싱톤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비'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나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의 부름에 응했던 우리나라의 아들, 딸들을 기립니다'는 글과
전사자, 실종자,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숫자가 적혀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지요.
우의를 입은 미군 수색대원들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 조심스럽게 발 내딛으며
탈출하는 모습을 표현한 16개의 청동 조각도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면서도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던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쟁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했네요.
우리의 자유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으니 한국전쟁에 참전, 우리를 도와준 16개 국가,
미국과 영국, 호주와 캐나다, 네덜란드,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터키와 태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에티오피아, 콜롬비아에는 두고두고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공원 안에는 우리나라와 미국이 1882년 5월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최혜국 대우, 제3 국이 어느 한쪽을 간섭하면 서로 도와준다는 거중조정, 관세 등을 포함한 전문 14조의 조약을 체결한
장소임을 밝히는 '체결지 비'가 있습니다.
이 조약은 우리나라가 구미 국가와 처음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으로
공원 정상의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과 내용이 연결되어 있었지요.
이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두 나라 간 100년에 걸친 역사적 우호 관계를 기념하고
상호 신뢰와 협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1982년에 건립하였답니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공자의 동상이 서 있는
이 계단은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1883년 설정된 일본조계와 1884년에 세운 청국조계의 경계입니다.
각국의 조계가 형성되면서 조계지에는 개항장 등의 외국인이 행정 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누리며 거주하게 됩니다.
조계지 경계 계단부터 신포시장 방향으로는 일본의 조계지, 좌측으로는 청국의 조계지가 들어서면서
경계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측의 각기 다른 건축양식, 중국식과 일본식 가옥을 볼 수 있었지요.
인천 개항박물관 등 다양한 역사박물관과 전시관에서도 그 시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은 '한국 속의 중국'으로
개항 당시 청국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붉은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룬 중국 특유의 화려한 건축물, 붉은 간판과 홍등 하며
그들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이어갑니다.
자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이 지역에서는
다양한 길거리 음식, 공갈빵, 월병과 홍두병, 화덕만두 등을 맛보는 즐거움도 있었지요.
코로나 시대에는 이런 중국인 조형물도 마스크를 쓰고 있네요.
'황제의 길' 계단에서 화려한 옥좌와
중국을 대표하는 만리장성,
시 한 수 나올법한 버드나무 낭창낭창한 정자 풍경을 지나면
'선린문'이 나옵니다.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 패루 중의 하나인 선린문은
색채가 정교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문은 귀신을 쫓고 상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까지 담고 있답니다.
선린문 좌우로는 역사소설, '초한지'의 대표적인 사건과 인물을 묘사한 명장면 벽화가 110m 거리에 펼쳐져 있어
중국 진나라 말부터 한나라 건국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등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명나라 때 종산거사가 지은 '서한연의'를 비롯하여 후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계속 각색해 가면서 읽는 재미를 더했습니다.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진나라 멸망 이후 분열된 제후국 중 가장 강성했던 초나라의 항우와 그에 대립했던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자치하기 위해 맞서 싸운 5년을 다룬 내용,
평민 출신 유방이 항우에게 제거당할 위기까지 몰렸지만 책사 장량과 명장 한신, 재상 소하들의 도움으로
세력을 차츰차츰 넓혀가며 그를 물리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여 한제국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이지요.
용맹과 무력에서 당해낼 장사가 없었던 영웅, 항우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지략과 모험, 처세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진나라 멸망 이후 각지의 군웅들이 항우가 들어 올린 초나라의 기치 아래 합류합니다.
유방과 항우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실질적 권력자가 된 항우는 팽성으로 돌아가 서초패왕을 자칭하며 제후들을 책봉하고
자신의 주군인 초나라 회왕마저 암살,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진나라의 잔존 세력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정책으로 민심을 크게 잃습니다.
한편, 서쪽 변방 파촉의 한왕으로 좌천되었던 유방은 군대를 양성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한신을 대장으로 삼고 '배수의 진'으로 조나라를 비롯한 다른 제후국들을 정복,
항복을 받아내어 항우를 고립시키면서 군신의 대의를 무너뜨린 항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원을 향하여 출병합니다.
초왕 항우와 한왕 유방이 책사들의 지략과 장수들의 무용에 힘입어 밀고 밀리는 수년간의 격전을 치른 끝에
일시적 화친을 맺지만 협정은 곧바로 파기되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제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최후의 일전만 남겨두었습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결전에 나선 한군의 대원수 한신은 심리전에도 능숙,
'사면초가'의 전략으로 초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마침내 해하 전투에서 그들을 궤멸시키면서
항우를 추격하여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하였지요.
이로써 기원전 202년 유방은 새 통일제국 한나라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전장에 나가기 전 항우와 애첩 우희는 마지막 술잔을 나누었고
기약 없이 떠나는 항우의 뒤에서 우희는 자결 합니다.
이 이야기는 대표적인 경극, '패왕별희'로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장국영이 우희역의 경극배우로 출연했던 중국 영화, '패왕별희'도 좋았지요.
영원한 것은 이 지상에 없었습니다.
전한, 후한 400년의 장구한 역사 끝에 황실의 부패와 무능, 환관들의 득세로 국력은 쇠퇴하고 민생은 황폐해집니다.
한나라의 해는 낙양에 저물고 황건적이 창궐하는 난세가 되어
도처에서 영웅들이 몸을 일으키면서 위촉오 세나라 이야기, 삼국지가 시작됩니다.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나관중이 집필한 고전소설, '삼국지연의'의
수많은 영웅들의 모험과 부침, 사랑과 전쟁, 지략과 권모술수를 담은 거리, 150m 길이의 삼국지 벽화거리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고사성어와 그림으로 즐기면서 삼국지의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조조, 유비, 손권이 대륙을 나누어 다스리는 삼국시대가 전개, 대립하면서 서기 220년 조조가 사망,
권력을 이어받은 조비가 헌제를 폐위시키고 위를 건국합니다.
221년 유비가 촉을, 229년 손권이 오를 건국하며 비로소 제갈량의 '삼분지계'가 완성되었지요.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유비가 죽고 그 아들 유선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받아 위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지만 위의 사마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북벌에 번번이 실패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제갈량을 막아내며 위 최고의 권력자가 된 사마의도 사망, 후손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263년 사마소가 촉을 정복하고
그 아들 사마염이 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에게 강제로 황제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진나라가 등장합니다.
거기에 280년 오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의 항복을 받으면서 진은 삼국을 통일했고
100여 년간의 삼국 역사가 여기에서 끝났지요.
중국 후한 말기.
황제의 권력은 약해지고 이틈을 타서 권력을 잡은 십상시의 횡포는 심각한데 여기에 황건적의 난까지 일어납니다.
이러한 난세에 뜻을 같이한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맺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잠심 주춤해지면서 십상시 제거에 적극적이었던 장수는 조조와 원소.
그러나 십상시 제거를 위하여 뒤늦게 궁으로 들어오던 유력 호족, 동탁은
조조와 원소에게 쫓겨 궁밖에 있던 황제를 만나면서 명분을 내세우며 대궐로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황제를 독살, 황제의 이복동생을 꼭두각시로 황제에 앉혀 국정농단을 시작하였지요.
압도적인 무술의 양아들, 여포 때문에 동탁 살해에 실패한 조조는 도망을 다니다가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이때 인물에 원소, 원술, 조조, 마등, 공송찬, 손견, 유비가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동탁은 여포에게 호뢰관에서 그들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장안으로 피할 궁리를 합니다.
호뢰관에서 여포는 수많은 연합군 장수들을 격파했지만
공손찬을 따라 참전했던 유비 삼 형제가 여포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힘에 부친 여포는 호뢰관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연합군의 화력에 놀란 여포와 동탁은 황제와 함께 장안으로 도망갑니다.
조조는 끝까지 쫓아가 황제를 차지하겠다며 뒤쫓다가 큰 피해를 입고 주저앉고
나머지 연합군도 눈치싸움을 합니다.
이에 실망한 유비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동탁과 여포의 갈등, 동탁의 죽음 이후 왕실은 조조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쥔 조조는 유비의 영웅 됨을 알아보고 어느 날 자기 집 후원으로 청해 술을 마시면서
유비의 마음을 알고자 합니다. 이때 유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놀라서 수저를 떨어뜨리는데
때마침 번개 치는 소리에 놀랐다고 둘러대면서 조조의 예리한 눈빛에서 벗어났다네요.
제갈량을 휘하의 軍師로 맞으려 그의 집에 세 번이나 찾아간 유비와 관우, 제갈량.
이후 유비는 제갈량의 도움을 받아 천하 쟁패에 나섭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설명한 전략은 '천하삼분지계'.
중원의 조조, 강남의 손권에 대항하여 서쪽의 파촉 땅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손권과 힘을 합쳐
조조에 대항하는 삼국 체제로 나서야 한다는 진언 장면도 보입니다.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조조는 동오 지역을 노리고 침략해 왔지만 손권의 군대는 수전에 강했기 때문에
숫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총사령관인 주유와 유비가 파견한 책사, 제갈공명의 지혜로 적벽대전에 임합니다.
팽팽한 심리전과 비책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갈공명이 예측했던 대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
조조의 10만 대군을 완전히 괴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대부분의 군사를 잃은 조조는 몇몇의 수하 장수와 함께 탈출하였지요.
이 전쟁에 공을 세우면서 유비는 형주 땅을 차지했고 관우, 장비에 더하여
조자룡, 황충, 마초 같은 든든한 장수들을 얻습니다.
유비가 형주를 비운 사이에 조조와 손권의 연합군이 형주를 공격하면서
관우는 적이 쏜 독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습니다.
그는 명의 화타가 치료를 하는 동안 마량과 바둑을 두면서 아픔을 참아내는 인내심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한 관우는 손권의 회유를 거절하면서 아들 관평과 함께 참수를 당했습니다.
조조 역시 관우가 죽은 지 1년이 지나자 병으로 죽으면서 아들 조비에게 권력을 넘깁니다.
이후 조비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공식적으로 한나라는 멸망합니다.
조비는 태자 계승의 경쟁 상대였던 동생 조식을 불러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라,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조식은 그 유명한 콩과 콩깍지를 예로 들면서 '칠보 시'를 지었지요.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한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관우와 장비에 죽음에 분노한 유비 또한 복수를 위한 전쟁터에서 죽으면서 제갈공명에게 북벌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비가 죽고 촉을 다스리게 된 제갈량은 남쪽 경계 지역인 남만을 평정하여 장차 북벌을 위한 준비에 착수합니다.
남만에 진격한 제갈량은 그곳의 추장, 맹획을 일곱 번 붙잡고 일곱 번 풀어줌으로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항복을 받고 성도로 돌아왔지요.
이 와중에 촉과 오가 동맹관계를 회복합니다.
촉의 북벌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위수 강가에는 위의 사마의가 튼튼한 고원 지대를 지키며 수비 일변도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제갈량이 있습니다.
북벌의 꿈을 잊지 못하던 이 불세출의 전략가는 여기 오장원에서 추풍처럼 쓰러졌지요.
그러면서 삼국지 초반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벽화 중간에 관우 조형이 있기에 이 '의리의 싸나이'와 사진 한 장 찍고
'공화춘'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부둣가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인부들의 야식을 짜장면으로 새롭게 변화시켰던 옛 공화춘은 1984년 문을 닫았고
그 건물은 현재 짜장면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옛 주방 식구들과 공화춘의 명성을 재현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
지금의 공화춘이 새롭게 태어났다네요.
공화춘의 짜장면은 해물이 많은 데다가 두부와 청양고추를 넣어서 느끼하지 않고 양도 적당해서 좋았습니다.
골목마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벽화로 어른들에게 추억을, 어린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송월동 동화마을.
동화 속 풍경이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문은 여닫을 때마다 기분이 좋겠지요?
오밀조밀 섬세함이 느껴지는 그림 속에서
마음은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의 숙소인 무의도 자연휴양림, 내 방에서 즐기는 일몰!
이 섬에도 가을이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