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담양, 1

좋은 아침 2022. 5. 3. 17:41

담양 여행에서는 '가사문학관', '소쇄원'과 '명옥헌원림', '식영정'과 '면앙정' 등 가사문학이 태동하고 발달한

이 지역의 강호가도 유적을 찾을 생각이었지요.

먼저 '한국가사문학관'에 왔습니다. 

 

 

잘 조성된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걸린 대형 액자,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에 압도됩니다. 

 

 

가사문학은 조선 성종 때,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이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귀향,

자연 속의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상춘곡’에 담으면서 그 시작이 됩니다.

이러한 은일가사(隱逸歌辭)는

임금에 대한 감사와 유교적 충의 이념을 결합한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지면서

사대부 가사문학인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풍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후 연군의 정을 노래한 유배가사,

자연친화에 출세의 야망을 담은 기행가사,

규방생활의 한을 노래한 여인들의 내방가사로 발전합니다.

 

 

가사문학이 정점을 이룬 16세기에는 당대의 뛰어난 선비들,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불우헌 정극인, 노계 박인로,

남명 조식 등의 작품이 많습니다. 

 

 

이 문학관에는 

 

'세속에  묻혀 사는 분네들, 나의 이 풍류생활이 어떠한가?

옛사람들의 풍류 넘치는 삶에 미칠까 못 미칠까?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나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왜 그들은 자연에 묻혀 사는 이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인가?

나는 맑은 시내 앞에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속에 자연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네'

 

로 시작하는 정극인의 '상춘곡',

 

 

중생들에게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 공덕을 권하는, 나옹화상의 '서왕가' 필사본도 있고 

 

 

면앙정 송순의 시문집인 '면앙집' 영인본과

 

 

송강 정철의 시문집인 '송강집'에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허난설헌의 규방가사, '규원가'도 있습니다. 

현존하는 내방가사 중 가장 오래된 이 작품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가사의 작가층이

여성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면서

윤 씨 집에 시집간 여인이 자식 잃은 애절한 슬픔을 표현한 가사, '상명가'와

 

 

먼 곳으로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를 그리워하며 지은 '사향곡' 들이 등장했지요.

 

 

소쇄원의 '제월당' 현판 글씨,

 

 

소쇄원의 '오곡문' 현판 글씨와

 

 

'면앙정' 현판 글씨도 보이고

 

 

'제월당'과 '광풍루'가 보이는 '소쇄원도' 판각과

 

 

선조 23년(1590년) 여름, 성산에서 복날의 더위 씻는 모임을 표현한  '성산계류탁열도'까지 있습니다.   

김성원의 '서하당'과 식영정',  김윤제의 '환벽당'까지 등장하네요.

 

 

면앙정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죽산별곡, 낙지가, 사미인곡, 무술가, 향음주례가,

충효가, 초당춘수곡, 백발가, 사친곡, 원유가, 석천별곡, 한농가, 효자가까지

무려 18편이 이 지역, 담양에서 탄생한 가사라는 자랑에 

 

 

문학관에는 영상실도 있어 가사문학에 관련된 사진을 보여 줍니다.

화면 속, 소쇄처사 양산보의 '제월당'과 '광풍루'가 반가웠습니다.

 

 

환벽당 아래의 '조대',

 

 

소쇄원의 다리, '위교'와  

 

 

'오곡문', '정천' 등의 그림도 있습니다. 

 

 

이제는 누각과 정자를 찾아갑니다. 

송순은 고서면의 충효동과 지곡리 일대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을 가리켜

'한 동네 안의 세 명승'이라고 자랑했다지요. 

 

 

그 중에서 식영정은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그림자도 쉬어 가는 정자’라는 뜻,

송강 정철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김윤제의 환벽당과 더불어 '송강 유적'으로 불린답니다.

'식영정'은 서하처사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주변에 정철이 김성원과 노닐던 '자미탄', '노자암과 방초주', '서석대' 등 멋진 경치가 많았으나

아쉽게도 광주호가 준공되면서 거의 수몰되었습니다.

 

 

뜰에 세워진 성산별곡의 시비만이 그 흔적을 알려주고 있었네요.

 

 

식영정의 뒷산은 별뫼, 한자로는 星山입니다. 

그는 이 주변의 풍광을 노래한 고경명의 ‘식영정 20詠’을 보고 ‘성산별곡’을 짓습니다. 

 

어느 지나가는 손님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들으시오.

인생 세간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당신은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고요하고 쓸쓸한 산중에 들어가 나오시지 않는가?

.

.

.

 

 

정철은 9세 때인 1545년 아버지가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51년 풀려나자

가족이 모두 한양에서 선대의 고향인 담양 창평으로 이사합니다.

그러면서 27세로 등과 하기 전과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에도

성산 기슭의 누정과 대숲을 벗 삼아 많은 가사와 시를 지었지요.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식영정 잡영 등은 모두 이 고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대숲 왼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식영정'에는 

 

 

현판과 

 

 

고경명이 지은 '식영정 20詠'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기서 노래한 풍경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식영정 뒤로는 성산별곡 시비가, 

 

 

계단 아래에는

 

 

'부용정'과 그 앞으로 '연지'가 나옵니다.

 

 

 

그 옆의 '서하당'은 김성원의 거처였답니다. 

서하당에서 자미탄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는 김성원의 친척인 김윤제가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낙향,

서재를 짓고 은거한 '환벽당'이 있습니다.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 지역이었지요.

 

 

정철의 '서하잡영'이 걸린 서하당 옆에는 

 

 

장서각도 있습니다. 

 

'

 

'소쇄원'에 왔습니다. 

 

 

소쇄원은 담양 지곡리의 양산보(1503~1557)가 지은 조선시대 원림으로

스승인 정암 조광조 (1482~1519)가 기묘사화로 화순의 능주로 유배되어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출세할 뜻을 버리고 창암촌에 낙향하여 만든 '隱者의 정원'입니다.

대자연에 곁들인 최소의 손길이 조화를 이루면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정원 중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송순,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억령 등 뜻을 같이 하는 당대의 시인들이 이곳에 모여들면서

이들은 '소쇄원 시단'이라고 불렸답니다.

소쇄원은 그들에게 담론의 공간이 되고 창작의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되면서 

소쇄원의 이러한 정자문화는 영산강 상류의 물줄기인 광주천과 광주호를 따라 이어집니다.

江湖歌道의 시작이었습니다.  

 

 

'瀟灑'는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

면앙정 송순은 양산보의 맑고 깨끗한  마음과 정신을 사랑하여 이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던 고결한 선비의 상징이 되었지요.

 

 

 

'소쇄원도'를 보면서 돌아다닙니다. 

 

 

정원의 계곡을 따라 '정천'이 흐르고 그 위에 통나무 다리, '위교'가 있어

소박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건너편의 '광풍루'를 보면서

 

 

'봉황이 오기를 기다리는 정자', '대봉대(待鳳臺)'를 지났습니다. 

 

 

이 待鳳臺에는 양산보의 스승인 조광조가 꿈꾸었던 세상,

왕도정치를 펼칠 지도자를 기다리는 은자의 염원을 담은 이름입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훈구척신과 신진 사림 사이를 오가던 당시 임금, 중종은 끝내 조광조의 믿음을 배신,

유배 끝에 사약을 내렸고 이를 지켜보던 양산보는 절망 속에서 세상에 나가기를 포기,

고향에 소쇄원을 만들고 대봉대를 지으면서 '봉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돌담 옆의 '오곡문'과

 

 

그 담 아래에 흘러가는 '정천'을 살린 배려에

 

 

'제월당' 안에는

 

 

'작은 정자 난간에 기대어'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한데 어울려 소쇄정을 이루었네

눈을 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귀 기울이면 구슬 굴리듯 물소리 들려오네

 

이렇게 1詠이 시작되는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詠’과 

 

 

고경명, 김성원, 정철이 받은 글도 보입니다.  

 

 

제월루에서 협문을 돌아 나오면

 

 

바로 앞에 정천을 둔 '광풍루'가 있습니다. 

 

 

 

하서 김인후가 붙여준 이름으로 주인의 공간인 '제월당(霽月堂)',  그 아래 사랑채인 '광풍각(光風閣)'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 한

중국 송나라의 명필 주무숙의 글에서 따왔답니다. 

소쇄처사 양산보의 인품을 잘 표현한 이름이었지요.

 

 

광풍루 현판 아래에는 '광풍루 중수기문' 있고 한글판도 보입니다. 

소쇄원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많이 파손되었지만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를 참고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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