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완도, 보길도

좋은 아침 2022. 4. 29. 22:28

강진을 떠나 해남의 도솔암에 들렀다가 땅끝 마을의 

여객선 터미널에서 노화도의 산양항으로 가는 페리를 탔습니다.

보길도와 노화도 간 연도교가 생기면서 이제 보길도는 노화도의 산양에서 육로를 들어갑니다. 

땅끝에서 노화도 산양으로 가는 페리는 06:40, 08:00 ~ 18:00까지는 1시간 간격으로 30분 거리.

반대로 산양에서 땅끝으로 가는 페리는 07:00 ~ 18:00까지 1시간 간격으로 다닙니다(하절기)

해광 운수 061 533 4269.

 

 

산양항 도착, 노화도를 가로질러

 

 

보길대교로 들어섰습니다.  

 

 

이 대교는 중간의 장사도를 거쳐 보길도와 이어집니다. 

 

 

 

보길도로 들어와 우선 오른쪽 길의 부용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격자봉(해발 435m)을 중심으로 북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의 이 부용동에는

고산 윤선도의 원림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찾은 '보길 고산 윤선도 문학관'은 월, 화 이틀간 휴관이라기에 밖에서 

 

 

문학관 건물과 

 

 

뜰의 '어부사시사' 일부를 새긴 시비를 찍고 낙서재로 갔었지요.

다음날은 수요일이어서 개관 시간에 맞춰 찾아갔지만 역시 인적이 없었네요. 

 

 

 

   세연정 입구의 관광정보센터 안에 들어가면  세연대 안내와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몇 번의 벼슬살이와 유배 끝에 고향인 해남에 머물고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임금을 찾아갔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에서 적에게 항복한 이후였답니다.

이에 실망한 고산은 중국의 백이와 기자처럼 살겠다며 제주도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잠시 쉬던 보길도에서 이곳의 경치에 취하여 머물게 되었다네요.

1937년 그의 나이 51세,

경관이 아름다운 부용동 계곡에 세연정과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등을 만들고 이곳을 묻혀 지내다가 

이후 조정의 부름에 어쩔 수 없는 벼슬살이에 나갔다가  다시 파직과 유배를 당하면서   

아예 보길도에 은거, 85세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부용동은 그가 보길도에 드나들며 머물렀던 13년 간

아름다운 우리말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의 시가를 지은 국문학의 산실입니다.

 

 

정보센터에는 고산의 일생을 숫자로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인조의 신뢰와 대군들의 존경을 받으며 왕가의 스승으로 5년을 봉직했고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며 임금에게 올린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에서는  

그의 강직했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의 가문에서 집권세력인 서인에 대립하면서 도합 16년의 유배생활 끝에

 

 

끝내 세상에 염증을 느껴 보길도에 은거,

자연과 어촌의 일상을 노래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75수의 시조를 남깁니다. 

 

 

토속적이며 고운 우리말을 고스란히 담아낸 '어부사시사' 사본과

 

 

춘하추동 전문도 보입니다.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모습'이라는 부용동 계곡에는

풍류 공간인 세연정,  곡수당과 삶의 공간인 낙서재, 인간세상을 굽어보는 신선 같은 공간인 동천석실이 이어집니다. 

 

 

부용동 원림은 어지러운 시대를 벗어나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려던 고산이

주변의 물과 바위 등을 활용하고 대자연을 끌어들인 별서정원으로 

담양의 소쇄원, 강진의 백운동 원림과 함께 '조선시대 호남의 3대 원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가 노래했던 '부용동 팔경'에는 

곡수당, 은병과 세연정, 동천석실, 격자봉과 솔재, 미산이 등장합니다 

 

 

관광정보센터에서 

 

 

비홍교를 지나 세연정으로 들어갑니다. 

 

 

세연정(洗然停)은

 

 

 '주변 경관이 물을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 

 

 

지금은 분합문을 모두 들어 올리면서 사방이 탁 트였습니다.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호와 마루를 두었기 때문에  창호의 분합문을 모두 올리면 온전한 정자가 됩니다.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굴뚝 다리라 부르는,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든 판석보가 있습니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네요.

 

 

그 옆의 동대(東臺)는  가로 6.7m,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약 1.5m인  자연석으로 쌓은 언덕.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어부사시사, 오우가 들을 부르며

이 언덕에서 여럿이 어울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을 풍류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세 개의 단이 남아 있는 서대(西臺)는 나선형 계단으로 위층에 오르는 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세연정 앞은 부용동 계곡의 물을 끌어들인 인공 연못, 세연지와 그 안에 석가산이 있습니다. 

 

 

고산은 세연정 주변의 잘 생긴 바위 일곱 개를 사랑하여 칠암이라 불렀다지요.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쏠 때 발받침으로 쓰였다는 사투암에

 

 

근처에는 금세라도 뛰어오를 듯한 혹약암을 보면서 

 

 

세연정에서 나와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로 갑니다.

 

 

 

곡류당 앞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에는 아치형 다리가,

 

 

오른쪽에는 서재가 보입니다.  

 

 

그 옆의 언덕에 자리 잡은 낙서재는 강학과 독서로 소일하는 은둔 선비의 생활공간,

고산이 1637년(인조 15년)에 보길도에 들어와 16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길도에 들어올 때마다 13년간 살았던 집으로

후손인 윤위가 쓴 '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의 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지요.

처음에는 초가집이었으나 후손들에 의해 기와집으로 바뀝니다.   

 

 

낙서대 마당에는 고산이 앉아 달구경 했다는 넓은 바위인 귀암이,

건너편 멀리, 격자봉 아래에는  조그마한 정자, 동천석실이 있습니다.    

 

 

고산의 일생은 과거 급제에 성균관을 거치면서 벼슬살이와 파직, 유배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말년은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노래하며 평화롭게 보낸 분이었습니다. 

동천석실이 내려다보는 부용동은 지금 유채화가 만발한 여유로운 봄날입니다.

 

 

보길도 서쪽 끝에는 낙조로 유명한 망끝전망대에

 

 

해변에 공룡알처럼 커다란 몽돌이 깔려 있는 뾰족산(보죽산)도 보입니다.

현재  예송리에서 이곳까지 오가는 산책로는 있지만

보길도를 일주하는 차도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붉은 하늘에서 옥매도의 숲으로 일몰이 시작되었습니다. 

 

 

보길도 예송리의 몽돌 해변에 접한 우리 숙소에서는  작은 어선들 뒤로 멀리 전복 양식장이 보이고 

 

 

아침에는 그 앞의 소안도에서 해가 떴지요.

40여 년 전의 숙소도 방문을 열면 바로 해변이 보이던 집이었는데 이쯤이 아니었을까 긴가민가했네요.

 

 

예송리 해변은 1.4km, 초승달 모양의  몽돌해수욕장입니다. 

해변을 걸어 

 

 

보옥항을 지나면

 

 

당집이 나오고

 

 

예송리 쪽 도로는 여기서 끝납니다. 

언젠가는 보족봉 앞에서 예송리까지 섬 일주도로가 완공되겠지만

길에서 만난 주민은 여기가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이라서 쉽지 않은 일이라 했습니다. 

 

 

소나무와 동백의 방풍림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안쪽의 마을 공터에 여기저기 쌓아 놓은 어구들이 섬 풍경을 보여줍니다.   

 

 

마을을 떠나면서 초입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송리는 

아름다운 해변과 천연기념물,  방풍림을 가진 작고 아늑한 어촌이었습니다.

 

 

보길도의 동쪽 끝, 백도 마을에 있는 '송시열 글씐 바위', '송시열 암각시문'을 보러 왔습니다.

 

 

숲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면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조선 숙종에게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받아 83세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이곳 보길도의 동쪽, 백도리에 잠시 머물 때 

자신의 심경을 암벽에 써놓았다는 오언절구가 암각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탁본으로 훼손되어 글씨는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 옆 안내문에는 자세한 풀이가 나옵니다. 

그는 그 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하여 한양으로 압송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한때 서인의 영수로 서슬 푸르던 인물도 그렇게 갔네요. 

조정의 예송 문제로 다툼이 많았다는 고산과 우암이 보길도와 이렇게 연결되는 일도 있으니

세상사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 장흥에 있는 이청준의 '문학자리'를 보기 위하여 보길도를 떠나

                 노화도의 동천항에서 완도의 화흥포로 갑니다.

                 거기서는 연도교를 따라 육지의 장흥까지 이어집니다.  

                 선박은 하루에 11회 운항되고 소요 시간은 30분.

                 경로 할인이 있고 자동차는 땅끝에서 산양까지 요금과 같은 18,000원. 

 

 

페리는 정확한 시간에

 

 

노화도의 동천항을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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