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강진, 2

좋은 아침 2022. 4. 26. 20:36

강진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강진만을 사이에 둔, 바지처럼 생긴 지형에

 

 

'탐진강 푸른 물결과 월출산 깊은 골짜기마다 다산의 실학정신과 영랑의 시혼이 빛난다'는

자부심의  고장입니다. 

 

 

먼저 다산의 족적을 찾아갑니다.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머물렀던 4년의 사의재, 그 후 1년 가까이 보은산방에서 지내다가

제자인 이학래의 집에서 2년, 윤단의 山亭에서 11년,

유배 생활 18년을 보내면서 그 장소들은 다산실학의 4대 성지가 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을 극진하게 대했던 개혁 군주, 정조의 승하 이후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앙 문제를 표면에 내세우면서 정적 제거에 나섭니다.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던 다산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지요.

이 와중에 정약용의 큰형 정약종과 형수, 매형인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들까지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고

다산은 작은 형인 정약전과 유배지로 떠납니다. 

한양을 출발한 다산은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나주 반남정 주막거리에서

흑산도로 유배 가는 형 정약전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날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월출산 동쪽 자락의 풀치에서 형과 헤어졌습니다.

 

사의재는 그가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4년 동안 기거하던 동문 밖 주막집.

 

 

주민들은 귀양 온 선비를 경계하여 멀리 했지만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만은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골방 하나를 내주었고

이 말에 다산은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하기로 다짐하면서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 네 가지를 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사의재' 당호를 걸고

6명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공부하기 좋은 천자문 교재, '아학편'과 '경세유표', '애절양'을 이곳에서 집필하였지요. 

근래 복원된 건물 주막, '사의재' 현판이 달린 초가 앞에는

다산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던 주모와 그의 딸 조각이 있습니다.  

 

 

다산에게 새로운 희망의 공간이었던 사의재에는

 

 

현재 청조루, 차 체험관, 동문 점방, 한옥체험관과 저잣거리, 사의재, 주막, 동천정, 다산강학당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관광산업개발의 일환으로 2018년에 강진군에서 복원, 신축한 건물들입니다.

 

 

청조루 옆에는 안경을 쓴 다산이 독서하는 중입니다. 

 

 

저잣거리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주막집이 나옵니다. 

 

 

다산이 즐겨 먹었다는

 

 

바지락전과 아욱된장국에 병영성 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앗, 아욱국은 늦게 나왔네요!)

 

 

하얀 등꽃 활짝 핀 뜰로 나오니 

 

 

이곳을 다녀간 시인 정호승의 '다산 주막' 시비가 보입니다.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술병을 들고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 나와

잔을 내밀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 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강진 18년의 유배 생활 속에서

제자를 기르고 책을 집필하면서 묵묵히 그 긴 세월을 견디어낸 다산이 큰 산처럼 내 마음에 다가옵니다.

위당 정인보는 다산을 '한자가 발명된 이래 최고의 사상가'라고 했다지요.

절망의 끝에서 민족의 큰 스승으로 부활한 대서사시의 주인공, 다산입니다. 

 

 

다산강학당과 

 

 

목민루, 

 

 

다산이 마셨다는 샘물, 동천정을 구경하면서

 

 

숙소인 한옥체험관에 왔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등

 

 

 

 

모란이 피어 있는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각별했네요.

 

 

청자의 고장답게 세면대와 변기는 비학문의 청자로 되어 있었지요. ㅎㅎ

 

 

다음날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언덕 한 면을 차지한 청자 조형이 눈을 끌었습니다. 

 

 

보리 이삭이 팬 그 들판을 지나

 

 

다산의 생애와 업적, 그의 연보와 가계도, 학통,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다산박물관'에 왔지만

오늘은 월요일, 휴관입니다. 

 

 

             이 박물관에서 남양주에 있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보내온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보냈던 훈계 담긴 '하피첩'과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 주었다는 '매화병제도',

 

 

'목민심서' 사본이라도 보고 싶었기에 실망!

화보로 대신합니다. 

 

 

야외에 조성한 

 

 

다산의 '말씀 정원'을 돌았습니다. 

 

 

지역의 주민들이 선정한 구절에

 

 

서예가들이 글씨를 쓴 말씀비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산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네요.

 

 

거기서 구강포의 귤동 마을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갑니다.  

 

 

다산과 추사 들이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면서 담소를 나누었다는 이 '귤송당'은

이제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초입의 소나무와 대나무 뿌리가 드러난 길은

시인 정호승이 이름을 지었다는 '뿌리의 길'입니다. 

모든 이의 뿌리가 된 다산과

그것을 시로 표현한 시인의 감성까지 모두 대단합니다. 

 

 

그 길에서 다산의 제자인 윤종진의 묘를 지났습니다. 

강진에 와서 여러 번 거처를 옮겨야 했던 다산은

외가 쪽 친척인 윤단의 도움으로 만덕산 중턱의 윤단산정에 거처를 정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고

제자를 기르며 글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후 윤단산정은 다산초당이 되었고 차나무가 많은 만덕산의 또 다른 이름, 다산은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윤단의 손자인 윤종진은 다산의 제자가 되어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하는데 한 몫을 했답니다. 

그의 묘 양쪽의 동자석이 특별해서 한 장 찍으며

 

 

 

도착한 다산의 초당.

 

 

비록 유배의 처지이기는 했지만 다산은 이 초당을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생각하면서

친필로 바위에 새긴 '丁石',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이던 넓은 바위 부뚜막, 다조(茶竈)와

 

 

초당 뒤편의 샘물인 약천(藥泉), 

 

 

초당 옆의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다산 4 경'이라 부르며 '다산4경첩'도 남겼지요.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의 추사 글씨, '다성각(茶星閣)' 현판을 붙인 서암은

초당에서 가르치던 18명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무너져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다시 세웠답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으로

다산이 11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실학을 연구하여 500여 권의 책을 서술했던

조선 실학의 산실이었습니다.

 

 

그 옆의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으로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며 

제자들과 같이 경서와 사서를 살피고 토론과 집필, 교정에 밤늦도록 연구에 몰두하면서

유배지인 다산초당은 학문의 성지로 변합니다.

이때 다산이 가장 고심하며 썼다는 '목민심서'(지방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에 관한 저술)와 

'흠흠심서'(백성이 억울함이 없도록 공정한 법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연구),

'경세유표'(국가의 전반적 체제와 경영 혁신  방안 제시)들이 나옵니다. 

 

여기 걸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 중년의 걸작이고

'다산동암(茶山東菴)'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거랍니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가, 천일각에서는 

 

 

강진만과 그 안의 작은 섬이 내려다 보입니다. 

다산은 이 언덕에 올라 멀리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형을 그리워했다네요. 

천일각은 다산 해배 이후에 세워집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1.1km 오솔길은

다산이 당대의 고승인 혜장선사와 교류하기 위하여 백련사를 오갈 때 걸어 다녔던 길,

유배 생활의 벗이자 스승이고 제자였던 다산과 혜장을 이어주는 통로였습니다.

이 길에서는 야생화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볼 수 있습니다. 

 

'정약용 남도유배길'  총 65.7km,

1코스 주작산휴양림길(18.4km, 약 5시간), 신전면 영수리~다산수련원,

2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16km, 약 5시간), 다산수련원~영랑생가,

3코스 시인의 마을길(13.4km, 약 4시간 30분), 영랑 생가~대월 달맞이마을,

4코스 그리움 짙은 녹색향기길(16.6km, 약 5시간 30분), 대월 달맞이마을~천황사 중에서  

2코스의 일부입니다. 

 

 

 

2층의 누각, 해월루를 거쳐

 

 

호젓한 신록의 숲과 

 

 

울창한 동백숲, 

 

 

 

야생차밭을 지나면

 

 

백련사 2층 누각, '만경루'가 나옵니다. 

 

 

대웅보전에는 초파일의 연등이 걸렸습니다. 

백련사는 1236년 불교계의 자체 정화와 기득권 중심에서 일반 민중까지 포괄하는 불교 대중화 등의 혁신운동,

'백련결사문'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습니다.

고려시대 8 국사와 조선시대 8 대사를 배출한 유명한 사찰이지요.

편액은 거침없이 활달한 그 당시의 명필, 이광사 글씨랍니다.

 

 

만세루 2층 누각에서 바라본 강진만은 안갯속에서 흐릿했습니다.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혜장은 다산에게 큰 슬픔을 안겼지요. 

해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자신의 저서를 총정리한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로 유명을 달리하여 여유당 뒷산에 묻혔습니다. 

 

 

강진읍내에서 점심으로 먹었던 한정식.

40여 년 전, 그때 아주 감동적이었던 이 음식점은 이제 세월과 함께 집도 맛도 같이 낡았습니다.

그 옛날의 명성이 덧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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