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아름다운 계절,
이번 여행은 화순과 강진, 보길도와 장흥을 거쳐 담양, 순창에서 끝나는 6박 7일의 일정입니다.
먼저 찾아온 곳은 전남 화순의
능주면에 있는
정암 조광조(1482~1419) 유배지.
능주로 들어가는 북문, 능주현 관아의 노비 집에 유배되어 살았던 정암의 초가는
1986년 복원되면서 말끔해졌습니다.
방안에는 정암의 유배 후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던 학포 양팽손이 찾아와 대면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 초가집에서 임금, 중종의 남다른 신임을 믿었던 정암은 한양의 해배 소식만을 기다리며
늘 방문을 열고 지냈다네요.
초가집 앞에는 영정각과 비각이 있습니다.
영정각에는 정암의 얼굴이 보입니다.
1482년(성종 13년) 한양에서 출생한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자는 효직, 호는 정암.
1510년 진사시 합격, 1518년 대사헌에 임명되어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를 주장하면서 현량과를 실시,
소장학자들을 선발하고 요직에 배치하여 신진사류들을 중심으로
구체제의 개혁과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갑자사화 때 처형된 김굉필, 정여창 등 사림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고
'여씨향악'을 전국에 배포, 성리학의 질서를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이러한 사림파의 개혁 활동은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며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고 두 세력 사이에서 고심하던 중종이 결국 정암을 포기하면서
그는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습니다.
기묘사화였지요.
그러나 그의 도학 정신은 후세로 계승되어 이황, 이이 등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면서
조선 유학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1568년(선조 원년)에 정암은 신원이 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용인의 심곡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1667년(현종 8년)에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능주 목사, 민여로가 세운
'정암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의 뒷면에는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던 정암을 추모하는 내용(한문 번역문)이 담겨 있습니다.
영정각의 칠언절구, '능성 적중시', 능주로 유배되면서 지은 정암의 시에는 날개를 꺾인 그의 절망이 보입니다.
정암이 사사된 후 양팽손이 그의 시신을 화순군 이양면의 중조산에 암장하고
사당을 지어 배향하다가
1570년 조정의 명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죽수서원의 사액을 받았습니다.
무등산의 한 줄기인 해발 100여 미터의 영구산,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은 계곡에는
많은 돌부처와 석탑들이 들어선 운주사가 있습니다.
석불과 석탑의 야외전시장 같은,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불가사의한 유적이랍니다.
일주문 밑에는
운주사 쪽을 바라보는 돌거북 한 마리가 보이고
뒤쪽에는 '천불천탑도량'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석불석탑이 각각 1 천구씩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적은 석불과 석탑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평면적이며 토속적인 얼굴, 기둥 모양의 몸체,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한 옷 주름, 둔중한 기법 등은
운주사 불상의 특징이고
둥근 원형탑, 원판형 탑의 특이한 모양에 다양한 층수와 너비가 좁은 것은 고려석탑의 특징이라지요.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하답니다.
더 나은 내세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쌓아 올렸던 미얀마 버간의 수많은 불탑이 생각났습니다.
길 따라
석불과 석탑이 이어집니다.
입구의 9층 석탑,
층상응회암벽 배경의 납작한 석불들,
언덕의 제멋에 겨운 '무소유탑'.
그 탑에서 내려다본
대웅전 가는 길에도
탑신에 무늬를 새긴 석탑과
석불들이 보입니다.
운주사 주변의 돌은 화산재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그 돌로 만든 불상과 탑은 납작하며 잘 깨지고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석불과 석탑이 거의 없는 상태였지요.
운주사는 그런 지질학적 특성을 인정받으면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명소로 지정되었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으로 둘러싸인 불상, 광배를 갖춘 불상도 있습니다.
다시 7층 석탑과
앞뒤로 불상이 들어앉은 석조 불감,
원형다층석탑을 만났습니다.
원형다층석탑의 원형 탑 아래 기단 면석은 10 각도로 갖추면서 거의 원에 가깝습니다.
운주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형식을 탈피한 독특한 절로
금강문의 사천왕상이나 담장도 없으며 건물 배치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형태에
경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불상과 석탑들이 자유롭게 놓여 있었지요.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천불 천탑이, 일제 시대 자료에는 석탑 30기와 불상 213기가 있었다고 전한답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석탑 12기와 석불상 70여 기는
그 생김새가 모두 다르고 거기에 깨어지고 마모되면서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서민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주었네요.
대웅전 옆길로 들어서면
'천불천탑 운주사 탐방로'가 나옵니다.
계단으로 한참 올라
와불을 찾아가는 길가에도
석탑들이 있습니다.
여기 와불(와형석조여래불)은 국내에서 가장 큰, 길이 12.7m, 10.3m의 희귀한 석불.
기존의 불상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지요.
운주사를 창건한 도선 국사가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으나
새벽닭이 울면서 마지막 작업이었던 이 불상은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와불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에
언젠가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극락정토가 올 것이라는 민간의 미륵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수직선이 새겨진 고려 시대의 7층 석탑을 보면서
내려가는 길의 채석장에는
석재의 결을 따라 구멍을 일렬로 뚫고 그곳에 쐐기를 박아 바위를 쪼갰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칠성바위와
그 암반 위에 세워 놓은 또 하나의 칠층석탑 옆을 지나면
여기에도 작은 석불들이 나옵니다.
불상의 모습도 모두 제각각.
요런 불상 보셨나요? ㅎㅎ
운주사에서 월출산을 보며 강진으로 가는 길에는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유배길에 같이 압송되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흑산도와 강진으로 갈라지는 길목인 이 고개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풀치'가 나옵니다.
정약전은 해배를 기다리다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였지요.
그 풀치를 지금은 터널로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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