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해남의 도솔암을 거쳐 보길도에 갔다가 거기서 완도로 이동, 장흥에 갔습니다.
그러나 보길도의 분량이 많았기 때문에 도솔암 이야기는 장흥과 함께 묶었지요.
그래서 순서가 섞였습니다.
도솔암은 미황사에 속한 작은 암자로
2년 전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 트레일' 때 시간에 쫓겨 이 도솔암을 포기하면서 언젠가 다시 오겠다 다짐했었지만
뜻밖에 그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멋진 경치 속의 기분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달마산 정상 근처의 바위 끝에 석축을 쌓고 작은 평지를 만들어 그 위에 지은 이 도솔암은
깎아지른 절벽의 지형으로 예전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도솔암 근처까지 도로가 생기면서 방문이 쉬워졌지요.
그래도 험한 산 길, 800m는 걸어가야 하는데
바로 이 오솔길과
여기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환상입니다.
이 길은 다양한 역사와 빼어난 자연환경을 가진 전남 지역의
해남 땅끝에서 강진, 영암, 화순과 곡성, 구례 지리산 자락까지 이어지는 500리 길에 조성한
'남도 오백 리 역사숲길'의 일부.
'우리 국토의 대동맥인 백두대간의 지맥을 잇는 상징성에
남도의 역사와 문화자원에 농어촌을 체험하고 경관을 즐기며 건강을 증진하는 숲길'이랍니다.
숲으로 들어가며
거친 준봉과
다도해의 작은 어촌 풍경들을 즐기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솔암은 통일신라 말기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기도도량으로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패한 왜군이 해상 퇴로가 막히자
육지로 도망가면서 달마산에 들어왔을 때 이 암자에 불을 질러 폐허가 된 것을
2002년 오대산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도솔암은 달마산의 정상부에 있으니
구름 낀 날이면 마치 그 위에 떠있는 듯 선경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겠지요?
높고 험한 암봉에 둘러싸인 도솔암은 그 위치부터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50m 아래의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샘, 용담의 물을 마시며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은 신령스러운 이곳에서 불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답니다.
누구인가 기와에 그림을 그려 도솔암 입구에 놓았습니다.
험준한 바위 틈의 도솔암과
긴 지팡이에 바랑을 짊어지고 구름 속 먼 길 떠나는 스님의 그림이 특별해서 한 장 찍고
자그마한 도솔암으로 들어갑니다.
고은 단청의 암자 안은
조촐했지만
주련에 쓰인 한 쌍의 구절, '조광장엄동해출(朝光莊嚴東海出)', '야경적정해중월(夜景寂靜海中月)'을 보며
의조화상이 일출과 달구경을 즐기는 낭만적인 스님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저 앞에 삼신각이 보입니다.
도솔암에서 보길도로 갔다가
노화도의 동천항에서 완도 화흥항으로 이동, 연도교인 신지교를 건너 신지도, 거기에서 장보고 대교를 지나고
고금도, 고금대교를 거쳐
강진의 신마항, 거기서 장흥에 왔습니다.
장흥의 회진면에 있는 '이청준의 문학자리'입니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이청준 문학자리'는
부모님과 그 분의 무덤 앞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았던 이청준이 세상을 떠난 뒤 한국 문단과 장흥은
'그의 엄결하고도 검박한 언행과 오로지 소설 창작에 정진한 웅숭깊은 정신에 부응하는 상징 조형물을
그의 고향에 남기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답니다.
2010년 4월부터 이청준과 그의 글을 사랑하는 선후배들, 친지, 독자들이
이청준 문학자리를 조성할 목적으로 모금을 시작, 개인 277명과 6개의 단체가 참여하여
당초 목표를 초과하는 액수가 접수되면서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여기에는 이청준이 직접 그린 문학지도가 그려져 있는 화강암 바닥,
14톤의 거대한 바위,
그 위에 새긴 그의 호 '미백'과 오석 글 기둥 한 면에 그려놓은 이청준의 캐리커쳐,
그가 유서처럼 남긴 '해변 아리랑'의 한 구절,
그는 늘
해변 밭 언덕 가에
나와 앉아
바다의 노래를
앓고 갔다.
노래가 다 했을 때
그와 그의 노래는
바다로 떠나갔다.
바다로 간 그의 노래는
반짝이는
물비늘이 되고
먼 돛배의 꿈이 되어
섬들과
바닷새와
바람의 전설로
살아갔다.
(해변 아리랑 중에서)
그의 문학적 정신을 기리는 찬문과 간략하게 정리된 약력 등을 배치되어 있습니다.
2010년 6월에 완공된 '이청준문학자리'는 그의 묘소와 진목리 갯나들 앞바다의 수평선이 이어지면서
그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다양한 시점에서 접근하도록 설정하였다지요.
안내글은 많은 이들의 마음으로 조성한 이곳 '이청준 문학자리'가 그의 문학을 교감하는 장소로 오래 기억되어
갯나들 바다의 물비늘처럼 반짝였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납니다.
이청준은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축제' 같은 작품도 많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서편제.
'한을 초월하여 집념을 승화시킨 장인의 고귀한 정신을 보여준다'는 소설입니다.
'서편제'는 '선학동 나그네', '소리의 빛'과 연작 형태를 이루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개하는 액자 소설.
한 사내가 소릿재의 주막에서 소릿재의 내력을 묻고 소리꾼 사내와 계집아이의 사연을 듣습니다.
어머니와 소리꾼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 그는 계집아이가 장님이 된 사연을 듣고
그 아이의 오라비임을 밝히며 누이동생을 찾고 싶다 하지요.
의붓누이의 한이 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화해와 사랑을 담은 소리의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다음의 작품 '선학동 나그네'에서 소리꾼 부녀의 흔적을 찾던 오빠는 선학동 포구의 기적 같은 이야기 끝에
자신이 그렇게 증오했던 의붓아비가 선학동의 포구에 묻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지막 소설인 '소리의 빛'에서는 소리꾼 딸과 의붓오빠인 사내가 상봉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짐작하면서도 무덤덤하게 서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도록 소리를 하고 북장단을 치다가 다음날 새벽에 사내가 떠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이 소설 '서편제'와 '소리의 빛', 두 개의 단편을 각색하여 만들었고
'선학동 나그네'로는 영화, '천연학'을 만들었습니다.
'이청준 문학자리'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를 추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고향과 근처에 산재한 각 소설의 무대를 하나하나 발견하는 반가움 속에서
이제는 세상을 없는 작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장흥의 천관문학관에 왔습니다.
3~4m, 거친 갈붓으로 일필휘지한 '천관시제'에는 이 지역에서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고 있었지요.
대표적인 문인은 이청준과 한승원.
장흥 출신 문인 분포도, '장흥 문학지도'에는
이청준,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알려진 소설가, 한승원과
이승우,
송기숙 등의 문인과
한승원의 서울에서 태어난 딸, 소설 '채식주의자'로 알려지면서 작품활동이 활발한 한강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버지보다 그 딸을 더 많이 알겠지요.
가사, '관서별곡'을 쓴 기봉, 백광홍을 비롯하여 조선조를 풍미했던 장흥 가단의 문인도 많습니다.
장흥에는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각색한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이 되면서 동네 이름을 아예 선학동으로 바꾼 마을이 있고
봄날의 유채꽃, 가을의 메밀꽃이 아름다운 이 마을 꽃밭을 지나는
'해산한승원문학현장비'에서 '한승원 생가'를 지나 '한재공원'과 '회령진성', '선학동 마을'과 '이청준 생가',
'이청준문학자리'를 잇는 12.5km의 '이청준, 한승원 문학길'이 생겼습니다.
장흥의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인 천관산(723m)은
정상 부근의 뾰족하게 솟은 바위들이 마치 '하늘을 다스리는 천자의 왕관 같아' 붙은 이름이랍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정상, 연대봉에 서면 다도해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연대봉에서 환희대까지 약 40여 만평에 이르는 10월의 억새 평원은 장관이라네요.
일반적인 등산 코스는 장천재 - 금수굴 - 연대봉에 이르는 2,5km, 약 1시간 30분의 길과
휴양림에서 환희대를 거쳐 연대봉에 이르는 2.8km, 1시간 30분 정도의 길이 있습니다.
이 땅에도 흥미로운 곳이 많아 다음 기회에 다시 올 생각입니다.
천관산의 자연휴양림에 있는 우리 방 앞에는 사과꽃이 만개하였습니다.
연둣빛 숲이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수필가 이양하는 '신록예찬'에서
이 신록을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며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대는 불행히도 짧다'고 아쉬워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