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의 지원을 받은 트레킹 전문 여행사 상품에 합류, 1박 2일 동안 영주와 봉화에 다녀왔습니다.
개별 여행보다는 일정이 빡빡했지만 내용은 알찼고
경북의 소도시 여행도 그 나름대로 좋았네요.
먼저 영주입니다.
영주는 부석사, 소수서원과 선비촌, 무섬전통마을, 소백산 국립공원, 국립산림치유원인 ‘다스림’과
소백산 풍기온천, 순흥 벽화고분, 인삼박물관 등의 볼거리, 즐길 거리에
토종콩인 부석태와 풍기인삼, 풍기인견과 영주 사과로 유명한 곳.
그러나 코로나 19로 이 도시에서도 모든 축제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처음 찾은 곳은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daslim.fowi.or.kr)'으로
소백산 국립공원, 묘적봉, 천부산 등 백두대간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용, 전체 42.4km 거리의 치유숲길을 걸으면서
글자 그대로 '일상에서 지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곳'입니다.
치유 정원에는 향기치유정원, 맨발치유정원, 한방체험전시원, 음이온치유정원들이 있고
水치유센터와 숙박시설인 주치마을과 문필마을에
청소년과 공공기관 워크숍 시설인 수련센터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도 모든 시설이 잠정적인 폐쇄에 들어가서 아쉬웠네요.
그러나 체력과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마실치유숲길(5.9km), 마루금치유숲길(3.9km), 문화탐방치유숲길(6.4km), 금빛치유숲길(5.8km), 볕바라기치유숲길(4.6km), 등산치유숲길(3.2km), 산악스포츠 치유숲길(12.6 km)까지 7개의 치유숲길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어
걷는 즐거움은 여전했지요.
우리는 그 중에서 마실치유숲길을 걸었습니다.
‘주치마을’과 연결되는 완만한 코스로
울창한 숲길을 동네 마실 가듯 한가롭게 걷고 2.3km의 숲 속 데크로드까지 지나는
모두 5.9km 거리, 2시간 정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역으로 명상센터에서 시작, 데크로드를 따라
늦가을의 숲을 걸었습니다.
곳곳의 안내글을 보면서
지그재그로 설치해 놓은 나무데크를 걸어 고항재까지 간 다음 거기에서 국도 25번을 가로질러
숲길로 주치마을까지 갑니다.
도중의 푸르뫼 쉼터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 국망봉 들이 반가웠습니다.
고항재는
백두대간의 묘적령에서 남쪽으로 2.1km 거리에 있는 해발 1020m의 고개로
마실치유숲길의 중간.
마루금치유숲길(3.5km), 문화탐방치유숲(6.4km), 금빛치유숲길(5.8km), 볕바라기치유숲길(4.6km)이
시작되거나 지나는 고갯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실치유숲길은 여기서 25번 국도를 건너 숲길로 이어져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숲길 입구가 막혀 있었네요.
할 수 없이 국도를 따라 걸으며 원점회귀로 끝냈지요.
25번 도로는 고항재에서 풍기 쪽으로 내려가는 급경사의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오가는 차들이 드물어서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멀리 우리가 걸어온 데크길의 낙엽송들이 보이는 길입니다.
다음의 목적지, 선비촌(www.sunbichon.net/)은
조선시대의 전통가옥을 복원하고 생활상을 재현, 유교문화를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영주시에서 건립한 테마파크.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옮겨서
그들의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고행적인 삶),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도덕적인 삶)의 4개 구역으로 나누고
주제에 따라 각각의 가옥에는 알맞은 전시물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기와집 7가구, 초가집 5 가구에 누각 1동, 정사 2동, 정려각 2동, 성황당 1동, 곳집 1동, 원두막 1동,
대장간 등의 저잣거리, 물레방아 등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사전 예약하면 윷놀이, 장작패기, 새끼꼬기 등 전통 놀이도 체험할 수 있답니다.
바로 옆에 소수서원이 있어 입장권은 통합권으로 판매합니다.
연중무휴의 개방으로 09:00~18:00 오픈. 계절 따라 변동이 있고 입장은 종료 1시간 전 마감.
주차장 광장에서는 소백산 둘레길 12개의 안내도와
영주 선비상,
선비촌 앞의 죽계천변 누각, 죽계루가 보입니다.
선비촌과 소수 사원 사이 뒤쪽에는 소수박물관이, 선비촌의 오른쪽에는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이 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돌면
선비촌.
기와집과 초가들이 늘어선 마을입니다.
우리의 숙소는 김세기 가옥의 안방.
중류층 선비들이 추구하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집으로
소박한 장롱의 안방과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에 의술을 가진 선비답게 약방으로 꾸며 놓은 사랑방,
창고에는 낡은 베틀과 탈곡기 같은 농기구들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안방은 숙박객을 위한 화장실을 들이면서 1인용 이부자리 두 개를 펴면 꽉 차는 작은 방이 되었네요.
창호지 문을 열면 담 너머로 초가의 이웃집이 보였지요.
초가지붕 이엉 작업 모습은 추억 속의 풍경입니다.
회헌 안향과 삼봉 정도전, 신재 주세붕을 거쳐 현재까지
옛 선비문화를 계승하고 선인들의 학문탐구와 생활모습의 재현하는 등
'전통적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전인교육의 요람'이라는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을 들여다보고
소수박물관 뜰에서
안향의 '제학궁'과 주세붕의 '도동곡', 공덕성의 '찬문비'를 구경하는 중입니다.
'제학궁'은
회헌 안향이 당시의 학교, 성균관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지은 7언절구로
이미 무너진 나라인 고려를 바로잡기는 어려웠으며 학문은 쇠퇴하고 유교는 침체되는,
참담한 그 당시의 시대상을 시에 담았고
'도동곡'은
1451년(중종 36년), 주세붕이 지은 경기체가로
안향의 옛 집터인 순흥 죽계에 사묘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한 후 지은 노래.
복희 씨로부터 공자를 거쳐 주자로 이어진 도학이 안향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므로
주자가 여산에 백록동서원을 세운 것과 같이
안향의 터전인 여기 소백산 죽계에 조선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공덕성의 '찬문비'는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이 안향을 고려의 '安子'로 찬양하여 지은 글,
그는 안향이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은 동방성리학의 비조라며 그렇게 불렀답니다.
안동의 ‘도산서원’, ‘병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대구의 ‘도동서원’, 경남의 ‘남계서원’, 전남 의 ‘필암서원’,
전북의 ‘무성서원’, 충남의 ‘돈암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통일신라 시대의 숙수사지에 ‘백운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조선 최초의 서원입니다.
고려말의 유학자로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회헌 안향이 나고 자란 이곳에 그분을 기리고자 만든 이 서원은
사림의 고등교육기관이 되어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한 지성의 요람이 되고
성리학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주세붕의 스승인 퇴계 이황의 건의로 명종의 친필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현재 그 편액(현판)은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죽계천 양 옆으로는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 수백 그루가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어라'는 의미에서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學者樹)라 불렀다네요.
죽계천 주변의 광풍루 등,
곳곳의 정자들은 선비들이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논하던 곳.
특히 1543년 주세붕이 세운 이 경렴정은 그가 제자들과 시연을 열고 호연지기를 키우던 장소였지요.
영정각은 안향의 영정을 모신 건물로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 옆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
덕망을 겸비한 문신, 한음 이덕형과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매헌 안향(1243~1306)은 고려 후기 문신.
고려 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으로
여러 번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였습니다.
국보 제111호인 안향의 영정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 있는 곳은 복제본이랍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초상화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지요.
영정각 앞에는 막대기를 꽂아 시간을 재던 해시계, '일영대'가 있고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성공묘의
담장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절, 숙수사지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절에서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었는데
그 장대를 당간, 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양쪽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