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의 억새밭에 가는 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상동 주차장 도착, 초입의 상가 골목을 지났습니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인 명성산(922m)은
'암벽과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당당하며 산과 호수, 단풍과 억새를 같이 즐길 수 있는 관광지'입니다.
삼각봉에서 내려오는 화전민터 일대의 분지는 억새의 군락지로 매년 10월 중순에는 억새축제가 열립니다.
후삼국시대,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은신, 피살되었던 곳으로
그가 망국의 슬픔을 못 이겨 터뜨린 통곡(鳴聲) 소리가 산천을 울렸다는 전설을 담은 이름,
명성산(鳴聲山)이 되었습니다.
안내판에는 네 개의 등산코스가 나와 있습니다.
제1코스는 상동주차장에서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억새밭과 팔각정을 거쳐 정상에 오르기.
제2코스는 상동주차장에서 비선폭포를 지나 책바위와 팔각정을 거쳐서 정상.
제3코스는 자인사를 지나 돌계단에서 갈림길로 들어섰다가 나무계단과 팔각정을 거쳐 정상.
제4코스는 산안고개에서 계곡을 지나 주능선을 타고 정상.
가파른 남쪽 대신 경사가 완만한 동쪽,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등산로 1코스를 선택,
억새밭까지 가는 일정으로 편도 3.4km, 왕복 4시간 예정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직 붉은빛이 남아 있는 단풍나무가 즐겁습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산길을 걸어
비선 폭포를 지나고 등룡 폭포를 만났습니다.
인근 포부대의 초소 앞을 지나면서 오늘은 포 훈련이 있어 정상에는 못 올라간다는 안내를 받고
이제부터는 철조망 옆길로 산에 오릅니다.
포 소리 들으며 돌길 걸어 올라가기도 지칠 무렵, 드디어 명성산 억새밭을 만났습니다.
먼저 억새바람길로 올라가기 시작,
계곡 가득 억새, 억새를 바라보며 돌아다녔지요.
한창때를 지났지만 억새들은 여전히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요.
멀리 전망대가 보이고
우리가 지나온 억새바람길도 내려다 보입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과
궁예의 약수를 지나
팔각정에서 바라본 조망.
팔각정 앞에도 군인들이 정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네요.
내려가는 길, 이번에는 외곽 길인 억새풍경길로 들어섰습니다.
나무데크보다 더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한동안 쉬었다가 늦은 오후에 하동주차장을 지나 돌계단 옆,
높이 15m, 폭 7m의 산정폭포를 보면서
김일성 별장 터를 지나
산정호수에 왔습니다.
병풍 같은 명성산을 중심으로 호수 양 옆에 망봉산과 망무봉을 끼고 있는, ‘산속의 우물처럼 맑은 호수’,
산정호수입니다.
원래 목적은 1925년에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 3.2km의 둘레길 산책이 좋습니다.
나무데크 길을 걷다가
아주 오래전, 산길을 걸었던 추억이 떠올라서
산으로 들어섰습니다.
수변을 따라 단풍은 여전히 붉었지만
전과 달리 젊은이 취향의 장식이 많습니다.
궁예 군사들이 적의 동태를 살폈다는 망무봉과
망봉산도 한 폭, 그림 속 풍경처럼 보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놀이동산, 조각공원도 조성되어 있었네요.
어두워지는 시간,
길가에 만들어 놓은 궁예의 이야기, 글과 그림을 보면서 내려갑니다.
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의 이야기는 미륵불 - 교사음일 - 궁예도은 - 궁예분골로 이어져 그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미륵불(彌勒佛) : 임금이 된 궁예는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를 버린 신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때때로 광기를 부리곤 했답니다.
지난날의 겸손과 명석은 사라지고 엉뚱한 행동을 하면서 신하들을 혼란에 빠뜨렸지요.
거기에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부처님이 내려와 백성을 잘 다스려 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 미륵불이라 했다네요.
교사음일(驕奢淫佚) : 궁예는 점차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지요.
밖으로는 왕건을 중심으로 주변국을 땅을 빼앗는 점령 전쟁을 계속하면서
호화스러운 궁을 짓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잃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뜻을 거스르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으며 사치와 방탕을 말리는
왕후와 두 왕자를 처참하게 죽일 정도!
이런 행동으로 인해 점차 몰락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궁예도은(弓裔逃隱) : 궁예가 임금으로서 자질을 잃어가고 있을 때 신하들이 뜻을 모아 반역을 도모,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처음 망설였던 왕건은 불의를 치는 것은 반역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의연히 받아들였고 이 사실을 안 궁예는 옷을 바꾸어 입고 명성산으로 도망갑니다.
궁예분골(弓裔粉骨) : 명성산으로 도망 온 궁예는 이틀 밤을 숨어 지냈지만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어서 마을로 내려와
보리 이삭을 잘라먹다가 신분이 발각되면서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여기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때가 서기 918년 봄.
궁예는 그가 세운 왕국과 함께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천 년 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나도 호숫가에서 한 장,
추억을 같이 한 2박의 숙소도 한 장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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