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의 1층, 특별전시실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2022년 11월 1일부터 2023년 3월 19일까지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2011년의 특별전,
2011년 7월 19일부터 9월 18일까지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에 이은 전시입니다.
'외규장각'은
1762년 조선 시대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설치한 국가도서관, 한양 창덕궁의 '규장각'에 이어
강화도에 지은 별도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의 혼례, 세자의 책봉, 장례, 궁궐의 건축과 같은 국가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 과정을 그림과 글로 적어 놓은 의례의 본보기 책, '의궤'를 만들어 기록으로 남깁니다.
정조 때 이러한 의궤를 강화의 외규장각에 보관하였으나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의 습격으로 강화성을 빼앗기면서
수많은 서적이 약탈을 당하거나 소실됩니다.
의궤는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서고에 묻혀 있다가
거기 동양문헌실에 근무하던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1923~2011)가 1975년 발견,
그 내용을 정리하며 반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민간단체와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계속 반환을 요청한 끝에
145년 만인 2011년 5월,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영구 임대 방식으로
1857년 당시의 450여 책에서 현존한 297 책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외규장각 의궤'는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소실되었던 강화의 외규장각 사고는 그 해에 강화 시내의 '고려왕궁터'에 복원되었지요.
박병선은 또 서고에서 찾아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불교 경전, '직지'를 사진으로 찍어
우리나라에 보내면서 영인본(사진본)을 발간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이는 국내에서 본격적인 '직지' 연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직지'는 1455년의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등 그 가치를 공인받았지만
약탈되었던 의궤와 달리 그 당시 매매 과정을 통하여 국외로 유출되면서
소유권을 잃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다네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가 인쇄되었던 청주의 흥국사, 그 역사적인 현장에는 '고인쇄박물관'과
복원된 흥덕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외국에서 오랜 시간 고군분투했던 박병선의 노고에 보답하여
정부에서는 1999년에 은관 문화훈장, 200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전시회장에는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영상코너도 있습니다.
입구에는 거대한 '동궐도'가 맞아줍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궐'로 불리던 창덕궁과 창경궁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 4년에 복원하고
다시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던 부분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던 도화서 화공의 기록입니다.
특별전의 서문에는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되면서 그간의 연구를 통하여 이 의궤에
'예법으로 왕조의 정통을 세우고 백성들을 아우르는 품격의 통치가 담긴 고귀한 내용'이 담겼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290 책이 왕을 위하여 만든 '어람용'으로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어 화려한 꽃과 구름무늬로 장식하였고
'어람용' 외에 '분상용'으로 몇 권의 사본을 더 만들어서 행사에 참고하도록 해당 관청에 보내거나 보관을 위하여
사고로 보냈습니다.
왕과 왕실의 위상을 정립, 강화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장엄한 의식을 치르면서 특별한 존재감을 부각하는 예법이었지만
이 의궤는 '단순한 결과보고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하나 상세하게 국가 주요 사업의 추진 원리와 지향점을 보여주는
국가 경영 지침서'에
'후세를 위한 모범적 선례이자 영구히 전해야 할 조선 왕조의 정신적 문화유산'이었지요.
전시장 안에는 297 책들이 사방의 거대한 서가에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복궁의 고궁박물관, 중앙박물관 등에서 소장한 유물도 많이 등장하였네요.
임금이 사용하는 의례용 도장, '어보'를 담은 외함인 '보록'과
정조의 글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의 인쇄본과 필사본,
'헌종실록'이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이후 '강화 정족산사고의 장사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서울대의 규장각에서 소장 중입니다.
이 책은 전주시에서 현대의 인쇄기술로 다시 펴낸 것이랍니다.
의궤 속 그림 중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 구조, 행사 때 사용한 물건의 형태 등을 그린 것을 '도설'이라고 하는데
이 도설이 포함된 의궤는 197 책으로 그중 다수인 115 책이 왕실 장례에 관련된 이유가
'기간이 길고 복잡한 장례를 차질 없이 치르기 위함'이었다네요.
향로와 촛대, 제기도 왕실의 위상과 예법에 맞게 표준을 정하면서
같은 모습의 왕실 제기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소의 모습을 본뜬 제주항아리인 '희준'과 코끼리 모습의 '상준'은
정조의 맏아들로 다섯 살에 홍역으로 죽은 문효세자(1782~1786)의 사당에서 사용하던 제기랍니다.
왕가의 능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에서는
상서로운 짐승인 四獸圖, 발톱이 5개인 청룡, 화염문을 두른 백호와 머리와 다리가 3개인 삼수삼족의 봉황인 주작,
뱀과 거북의 합체 형상인 현무가 화려합니다.
1752년(영조 28), 영조의 맏손자인 의소세손(1750~1752)의 장례과정을 기록한 자료인 '반차도',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도 있습니다.
'반차도'는 '행차의 설계도',
줄 지어 나가는 행렬 순서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하나의 섬세한 선과 채색은 경건하고 위엄에 넘칩니다.
'서궐영건의궤'는 1829년의 경희궁 대화재 후 1830년부터 1831년까지 진행된 재건축의 내용을 담은 의궤로
'일제강점기에 특히 훼손이 심했던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국가 의례나 왕실 행사에서 왕과 왕비, 여러 관원과 군인들이 줄 지어 행차하는 그림, 이 '반차도'에서도
등장하는 사람과 기물을 세세하게 그리고 채색하여 조선시대 왕실의 행렬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진행되었던 '문효세자'의 책봉 선포 장면을 그린 '왕세자선책도' 병풍에서
정조는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보는 앞에서 세자에게 장차 왕위를 계승할 사람임을 천명하는 일종의 임명장인 '죽책'과
왕세자를 상징하는 '옥인'을 하사합니다.
헌종의 혼례 축하 그림 병풍에는 헌종(재위 기간 1854~1849)이 효정왕후 홍 씨와 혼례를 올린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는 '진하 의례'의 장면이,
아래 그림, '예궐 반차도'에는 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또 다른 신부(후궁)의 행렬이 보입니다.
'세조 어진 초본'도 있습니다.
원래 이 어진은 세조의 능인 광릉 봉선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보존 상태가 나빠서 여러 번 다시 모사했지만
그나마 한국전쟁 와중에서 모두 소실되었답니다.
다행히도 이 초본은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였던 이당 김은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라네요.
'단종 정순왕후 복위부묘도감의궤'에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3년 만에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단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1698년(숙종 24)에 복위 절차와 종묘봉안과정을 기록한 반차도로
왕에게 올린 단자에는
단종의 시호로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묘호로는 '단종', 능호는 '장릉'으로 정하였음을 알리고 있었지요.
단종과 정순왕후의 시호를 지어 올리면서 제작한 두 분의 '금보'입니다.
단종의 금보에는 그의 시호가, 정순왕후의 금보에는 '단량재경정순왕후지보'를 새겼습니다.
실학박물관에 보관 중인 '김석주보사공신화상'도 나옵니다.
'김석주'는 숙종 즉위로 세력을 잡았던 남인의 대표 인물인 영의정 허적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계기로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남인 세력을 일거에 숙청했던 '경신환국'의 대표적인 서인입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고 다시 남인이 집권했다가
1694년 '갑술환국'에서는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삭훈되었던 '보사공신 1등 칭호'가 복원되는 일도 있었다네요.
붕당의 시대였지요.
'보사공신 1등'에 녹훈된 '김만기 공신녹훈교서'에는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에서 그가 세운 공을 치하하고 공신화상을 그려주며 품계를 3등급 올리고
노비와 말, 은자들을 내린다는 왕명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농사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 선농제(先農祭)에 대한 기록도 보입니다.
1739년 (영조 15) 1월에 영조가 직접 참여한 '친경의궤'에서는
영조가 도성 동쪽의 선농단에서 농경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先農祭를 지낸 후 '동적전'에 가서
쟁기질을 하며 농사일에 시범을 보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 의례에는 인근 고을에서 선발한 100명의 농민과 76세 이상의 노인 40명 등 일반 백성들도 참여했다네요.
행사가 끝나고 모두 어울려 먹었던 음식은 '선농탕', 지금의 설렁탕이 되었습니다.
'친경도'에는 선농단 옆 왕이 친히 쟁기질을 하는 자리인 친경원, '동적전'이 표시되어 있고
제기와 안암, 목멱산(지금의 남산), 이태원, 인왕산 , 주교, 청파, 한강과 그 아래 압구정 등
지금도 사용하는 지명들이 보입니다.
덕수궁에 소장된 '경직도'는 농사와 길쌈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중에서 '볍씨 뿌리기', 모판에서 모를 뽑는 '모찌기', '모심기'와 잡초를 솎아내는 '두벌 김매기' 등의 기록이 담겼습니다.
그림 위에는 각각의 장면에 어울리는 시를 적어 국왕은 항상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았답니다.
제사가 지난 신주를 봉안하던 별묘인 '영녕전'을 개조, 공사하면서 남긴 기록인 '영녕전수개도감의궤'에는
공사에 참여한 장인과 일꾼들에게 지급한 품삯도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영녕전 공사에서 장인은 월급으로 쌀 9말(144kg)과 옷감 2 필을 받았네요.
17~18세기 중엽까지는 장인보다 일꾼의 품삯을 더 나가는데
그 이후에는 장인들이 일꾼의 두 배로 역전됩니다.
의례 중에는 왕실의 웃어른에 대한 효심도 보입니다.
순조는 기사년(1809), 할머니인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 씨의 관례(성인식) 60주년을 축하하고자
장수를 기원하며 새 옷감을 진상하는 '진표리의례'를 행하였고
그리고 한 달 위에는 왕실 친인척들이 모여 축하 잔치인 '진찬'도 열었지요.
모란꽃이 화사한 병풍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커다란 장식 화병이 놓여 있습니다.
음식, 양산과 부채 등 주인공의 위상을 상징하는 의장의 종류와 숫자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높은 수준으로 마련하면서
진표리 의례 때에는 헌가를,
진찬 때에는 헌가와 등가를 같이 배치하여 연주하였답니다.
그림 '헌가도'와 '등가도'에는 각각의 악기 이름에 악사들의 표정까지 보입니다.
악기 중에는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엎드린 호랑이의 등에 톱날이 달린 헌가도의 '축',
역시 헌가도에서 보이는 전통 북으로 가장 큰 화려한 장식의 '건고'와 양끝에 봉황을 새기고 중앙에 달을 그린 '응고',
등가도에 나오는 경석 16개를 매달아 연주하는 악기 편경과 16개의 종을 매달아 놓은 편종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사진표리진찬의궤'는 현재 그 원본이 유출, 영국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특별전을 위하여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다른 분의 가례도감을 참고,
세부 문양과 장식까지 모두 원형에 가깝게 전통방식으로 복원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이런 자리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하던 여령의 복식도 그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진표리의례'에는
음식과 술이 나오고 헌가와 등가가 음악을 연주하면
순조가 혜경궁 앞으로 나와 두 번 절을 올린 후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절을 하면서 만수무강을 비는 '천세, 천세, 천세'를 외치는 잔치 장면이 나옵니다.
'왕족과 초청받은 손님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관원, 악공, 여령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의례 절차에 따르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왕실 잔치의 모습은 예로 만든 질서 속에서 모두가 어우러지는 이상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책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각 분야의 장인들 이름도 등장합니다.
사농공상의 계급사회에서 장인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도 의외였지요.
'1897년 10월 12일,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500여 년 동안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이제는 황제의 나라로 변모했지만 의궤 제작은 계속되면서
초록색 대신에 황제의 상징인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삼고 황태자에게 올리는 의궤는 붉은 비단으로 표지를 만듭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예법에 맞는 의례와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다는 의궤의 본질을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전시회의 마지막 장은
'때와 장소가 달라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이 사회모습은 그것을 실현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선 왕조의 방식 중 하나는 바른 예법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나온 것이 바로 조선왕조의궤였지요.
박물관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의궤의 가치를 조명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연구하여 우리 역사와 문화의 진면목을 끌어내고 쌓아 다시 전시의 장을 마련할 것입니다.'로
끝납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 앞의 연못을 돌았습니다.
이국 땅에서 오랜 세월, '외규장각의궤'의 발견과 조사, 반환을 위한 노력에
'직지'의 가치를 세상에 알렸던 박병선의 힘들고 외로웠던 싸움을 생각하는 시간,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고 지켜냈던, '조선 왕조 기록문화의 꽃'이라는 의궤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연못 속, '청와정'을 지나면
박물관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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