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책

추사를 찾아서

좋은 아침 2023. 2. 17. 12:46

추사를 찾아서

예산의 생가와  제주의 유배지, 말년의 과천을 찾았던 여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먼저 충남 예산에 있는 그의 생가입니다. 

 

 

 

 

추사는 1786년 (정조 10년) 6월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던 경주 김 씨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지요. 

안으로 들어가면

 

 

댓돌 앞에 추사의 글씨에서 각자한  '석년'이라는 이름의 해시계가 서 있는 사랑채에

 

 

'차를 끓이는 죽로가 있는 방',  '죽로화실'과 주련, 

 

 

방 안의 병풍에도 추사의 글씨가 보입니다.

 

 

안채를 지나 수선화 꽃밭이 있는 뒤뜰로 올라가면 

 

 

영당. 

그의 평생 친구, 권돈인은 추사 사후 영당 세우는 일을 도우면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썼고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추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답니다.

현재 그 초상화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생가 왼쪽,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그 부인,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앞에는

 

 

영조의 친필 비석, 어필이 보입니다.  

 

 

화순옹주는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14일 동안 음식을 끊고 남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영조는 옹주가 음식을 보낸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여겨 열녀정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뒤를 이은 정조는 홍문을 세우고 

 

 

그 안에 열녀문이 설 자리를 빈터로 남겼습니다 

 

 

추사 생가의 오른쪽, 그가 태어나자 가뭄이 해갈되면서 다시 물이 차올랐다는 전설의 우물을 지나면 

'완당선생경주김공위정희묘'가 나옵니다. 

 

 

묘 앞의 망주석, '떠돌던 혼령이 자신의 안식처를 찾아가기 쉽게 설치한 표지'에는 다람쥐 같은 동물이 새겨 있었네요. 

 

 

 

추사기념관 앞에는

 

 

추사의 동상이,

 

 

안에는 제주 유배 시절, 청나라에서 구해온 귀한 책들을 자주 보내준 역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했던 그림,

'세한도'와 

 

 

초의의 차를 마시며 답례로 써 보냈던 글씨, 간송미술관 소장의 '명선'이 맞아줍니다 

 

 

추사는  24세인 1809년,

아버지인 김노경이 동지겸 사은부사가 되어 연경(지금의 북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하며 40여 일 머무는 동안 

청의 앞서가는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스승, 실학자 박제가의 말을 명심하고

청나라 대학자로 고증학과 금석학, 경학에 밝은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필담을 나누면서 

두 사람의 학문적인 깊이에 감동하여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추사는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스승에 대한 각별한 존경을 표했지요.

 

 

그는 청동기, 철기, 비석 등에 새겨진 銘文을 연구하고 문자를 판독하면서 이를 통하여 고전의 내용을 복원하고

옛 서체를 발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금석학과 

유교 경전의  문헌적인 고증을 토대로 경전을 정비, 해석하는 고증학,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망실된 유교 경전을 복원하면서 각 시대에 알맞은 형태로 변화하던 경학에 관심을 갖고

청의 학자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조선의 금석학과 고전, 글씨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로 담을 두른 추사관의 뜰에는

 

 

다양한 글씨체의 '추사 글씨탑'이 보입니다. 

추사는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초서 모든 글씨체에 통달했지만 그중에서 예서를 좋아하고 잘 썼다지요. 

 

 

추사체험관에서는 탁본 뜨기, 난초 그리기, 세한도 그리기, 추사체 쓰기, 부채 꾸미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제주의 '추사유배지'와 '제주추사관'은 는 복원된 대정현성의 한쪽에 조성되었고

 

 

그 유배지의 뜰에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가 있습니다. 

 

 

중죄인으로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는 집을 둘러싼 가시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습니다.

터만 남아 경작지로 사용하던 추사의 옛 처소는 1984년 집주인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면서

 

 

담밖에는 추사가 좋아하였다는 수선화가 만개했었네요.

 

 

당시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하였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추사는 유배 중에도 이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면서 지역 교육에 헌신하였고 

 

 

찾아온 초의 선사와 차담을 나누면서 이 고장에 차문화를 전했습니다.

 

 

이때에 예서체와 전서체가 가미되어 고졸한 느낌을 주는 '풍사실'

- 마음이 넉넉한 선비가 사는 방'의 뜻을 지닌 글씨를 남겼습니다. 

 '추사체'의 독창성이 완성되던 시기였지요.  

 

 

 

말년을 보냈던 경기도 과천의 '추사박물관'입니다.

 

 

24세에 생원과에 급제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던 추사는 규장각 대교와 암행어사를 거쳐 형조참판까지 지냈지만

정쟁에 휘말리면서  9년 가까운 제주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해배 후 그는 예산의 용산 아래 생가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고

1년 후 풀려나면서 아버지의 별서인  과천  '과지 초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복원한 과지초당 앞의 추사박물관은

1층 추사의 학예, 2층 추사의 생애, 지하 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체험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덟 살의 추사가 후사 없는 백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친부에게 보낸 안부  편지에서는

어릴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그의 재능과 인품을 볼 수 있었지요.

 

 

추사는  청나라 '옹방강',  '완원'과 계속 교류하면서

 

 

816년 청의 고증학을 자신의 입장에서 종합, 정리한 새로운 '經學觀', '實事求是說'을 정리한 일도 나옵니다 

 '실제 있는 일에서 올바른 이치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설'에서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 

'실제 있지도 않은 것을 일 삼아 속이 텅 비고 엉성한 잔꾀로 방법을 삼는다거나

그 올바른 이치를 찾지 않고  잘못 얻어 들은 말로 주장을 삼는다면 그것은 성현의 길에 어긋나는 것이다.'라

갈파하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념적이고 경직된 성리학으로는

조선사회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던 이 시기에 그 대응책을 모색하던 젊은 실학자들은

청의 고증학을 수용하며 정치제도와 사회 구조 개혁을 주장했지만 곧 기존체제의 벽에 부딪힙니다. 

 

 

추사 53세, 1833년에 음운학, 천문학, 경학, 시문 등 청의 16개 학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던

'해외묵연' 제목의 글 초고와

 

 

고증학의 實事求是에 대한 그의 주장이 담긴  '완당선생전집' 도 보입니다. 

 

 

청나라에서 금석학을 공부한 추사는 비석에 새겨진 단순하고 힘찬 옛 글씨를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모든 옛 비석의 글씨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글씨들은 추사체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1816년 북한산에 올라가 발견한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 '북한산진흥왕순수비'임을 밝히면서

금석학을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진흥북수고경'과

 

 

 '시의 경계', 또는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치'를 의미하는 글씨로 획이 굵은,

생가 뒤편의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긴 '시경'에

 

 

추사가 제주 유배 중인 1846년, 추사가문의 원찰인 화암사 중창 때 써 보낸 조형미 담긴 글씨, '무량수각',

 

 

'푸른 대나무와 같은 청렴함'의 뜻을 가진 구성미 뛰어난  '여균사청'의 글씨에서는

변화하는 추사의 서체와 그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사는 추사, 완당 외에도 무려 200개가 넘는 호가 있었다네요.

 

 

수결과 성명인, 호인, 수장인과 심정인, 명구인과 길상인 등 다양한 인장들이 흥미로웠지요.

그는 詩, 書, 畵 뿐만이 아니라  篆刻(전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4년의 과천 시절,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는

내용을 보고 수많은 연습과 변화를 추구했던 그 노력에 감동하며

 

 

그가 남긴  벼루와 붓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서체의 대련, '촌로상락'의 '대팽두부과강채, 거화주처아녀손'은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같은 채소이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는 뜻으로 

가장자리에 덧붙여 설명하는 글씨, '화제'에는 

'이것은 시골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최상의 즐거움이 비록 허리춤에 말만큼 큰 황금인장을 차고 몇 장 길이의 밥상에다 시중드는 첩이 몇 백이라도 능히 이 맛을 누리는 이가 몇이나 될까? 고농이 쓰다'로 끝을 맺습니다. 

 

 

'세한도'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인 '불이선란도'는 그의 학예일치와 시서화 일치를 잘 보여주는 이상적인 그림으로 

서체적인 특징과 4개의 발문이 곁들인 이 시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감상자들의 도장까지 여러 개의 낙관이 보이네요.

 

 

1856년 71세, 병 중이던 서거 3일 전에 쓴 '판전 '은

기교 없이 단단한 기개가 보이는 글씨로 '봉은사'의 대장각 현판입니다.

 

 

그의 서거 이후 조선왕조실록의 '철종실록'에는

'세간에서 그를 송의 소동파에 견주었다'는 내용의 '김정희 졸기'가 실렸고

 

 

초의 선사를 비롯한 많은 문인과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회고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의 영인본도 보입니다. 

 

 

박물관 지하 1층에는 추사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츠카 기증실'이 있습니다. 

 

 

유배 5년째, 1884년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70cm의 이 '세한도'는 

청의 문인 16인과 정인보, 오세창 등 우리나라 후대 문인들의 발문을 받으면서  길이 13m의 두루마리 형태가 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일본인 후지츠카 박사가 소장하고 있었고

1944년 손재형이 매입한 이후 몇 단계를 거쳐서 '불이선란도'와 함께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 기증됩니다. 

세한도에는 제주로 유배된 추사가 겪은 마음의 고통과 성찰 과정이

메마른 붓질과 황량한 제주 풍경에 은유적으로 나타나면서 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추사에게 제주 유배의 9년은 '세한의 시간'을 이겨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깊이가 담기는 시기였지요. 

과천 추사관의 '세한도'는 후지츠카가  영인했던 세한도 100점 중의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