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의 관광지 중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낙안읍성입니다.
순천의 낙안읍성은 조선 시대 전기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계획도시로
성곽과 중요 민속자료 등 다양한 문화재와 가야금 병창에 판소리 등
유무형의 자원이 조선시대의 읍성 안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성 안에는 현재 98 세대에 228명의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었지요.
삼한시대에는 마한, 삼국시대에는 파지성, 고려말 이후부터는 낙안군으로, 이후 순천군에 편입되면서
지금은 순천시 낙안읍이 되었습니다.
읍성은 장방형으로 성곽의 길이가 1410m, 전체 면적은 약 7000여 평으로
동과 서, 남쪽의 큰 도로는 서로 연결된 성문에 네 군데의 치성이 있습니다.
서문인 '낙추문'으로 들어가 성벽 위를 걸으면서 내려다본 마을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고풍스러웠습니다.
성벽은 남문인 '쌍청루'로 연결됩니다.
초가들은 새 짚으로 지붕을 갈았고
여기저기 노란 유자와 주홍빛 감이 풍성했으며
돌담 앞 채마밭의 배추는 속이 꽉 찼습니다.
쌍청루 옆에는
치성이 있고
그 아래에는 낡은 초가의 지붕을 다시 얹기 위하여 이엉을 엮는 노인들이 보입니다.
작지만 모든 것을 갖춘 아담한 마을이었네요.
연지와
마을의 장독대를 지나면서
아득한 유년의 기억, 곶감을 만드는 풍경도 보았지요.
동문인 '낙풍루'에서 마을 안으로 내려와
한때 이곳의 군수를 지냈던 임경업 장군의
선정을 기리는 비각을 보며
마을 식당가를 지났습니다.
홍살문 안쪽에는
활짝 핀 아기 동백 옆으로 출장 중인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가 있고
근처 낙민루 뒤로
사심 없는 일처리를 다짐하듯 '사무당'이라는 현판의 동헌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 앞에 놓인 긴 창과 장검,
죄인을 압박하고 조서를 쓰는 책상에 곤장 맞는 형틀을 보니 무시무시합니다.
여기서는 매 주말 상설 공연이 있어
판소리와 기예무단, 기악과 가야금, 사물놀이, 전통혼례 등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데
오늘은 평일이라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마을을 방문,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지원받았다는 등의 낙안 역사를 지켜본
노거수, 은행나무는 이제 지방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성 안에는 '김만갑 명창 생가'와 '오태석 명창 생가'가 있고
전통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았지만 비수기의 평일에는 행사가 없었네요.
요즘 보기 힘든 목화밭을 지나 다시 서문으로 나갑니다.
다음 목적지는 선암사와 송광사.
조계산을 두고 동서로 나뉘어 있어 두 절 사이를 이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선암사로 들어가는 '심산호반'의 '조정래 길'에는
가로수인 감나무 열매가 풍성한 가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절 입구에는 선암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나와 있었습니다.
한국의 산지승원인 선암사와 통도사, 부석사와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와 대흥사의 7개 사찰 중의 하나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음과
선암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며 이 절의 자연환경 안내가 첫인상을 좋게 합니다.
입구의 '승선교'는 선암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강선루'와 어울린 하나의 스토리,
이 누각으로 선선이 내려와 맑은 계곡물에 목욕을 하고 저 다리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성한 야생차밭과
일주문, 범종루를 지나
대웅전에 와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라는 3층 석탑 한 쌍과
벽에 화재를 막기 위한 주술적인 글자, '水, 海'를 새긴 심검당을 지났습니다.
수차례의 화재로 계속 중수와 개축을 겪어야 했던 스님들의 고육지책이었답니다.
'팔상전'의 만불이 등장하는 탱화는 화려했고
스님들의 노후를 배려한 듯, 원로스님을 위한 '무우전'도 보기 좋았습니다.
여기는 선교양종대본산(禪敎兩宗大本山), 호남 제일 선원답게 응진당에서는 묵언수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네요.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조계산 허리를 따라가는 '천년불심길'도 있습니다.
오래전 송광사에서 선암사까지 이 길을 걷고
중간 굴목재의 작은 식당에서 보리밥으로 점심을 먹었던 추억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차를 타고 이동,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에 왔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법정스님이 자주 걸으셨던 '무소유길' 걷기.
편백나무 사이로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산길, 곳곳에
스님의 말씀이 보입니다.
16 국사 중 제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 폐사 터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법정 스님이 1975년 중건, 불일암이라는 편액을 걸으셨지요.
스님은 이곳에서 '무소유', '선가귀감', '영혼의 모음', '불타석가모니', '말과 침묵',
'산방한담', '진리의 말씀', '물소리 바람소리', '신역 화엄경', '텅 빈 충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숫타니파타', '인도기행', '버리고 떠나기' 등의 수필집과 번역서를 집필하고 2010년 3월 11일 열반하셨습니다.
댓돌의 놓인 하얀 고무신 한 켤레.
지금도 여전히 저 안에 계신 듯, 스님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았네요.
활짝 웃는 사진 아래, 스님이 직접 만들었던 저 의자에는
이제 스님 대신 참배 기념으로 가져가라는 책갈피와 방명록, 오느라 수고하였으니 맛보시라는 사탕이 놓여 있습니다.
스님이 산새들에게 모이를 주어 겨울나기를 도왔던 저 탁자,
그 옆의 참배자들을 위한 시원한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와 컵들,
스님이 가꾸셨던 저 채마밭,
무엇보다도 스님이 계신 저 후박나무 아래를 보면서 가슴이 저렸습니다.
나무 밑에는
'법정스님 계신 곳
1932.10. 08 ~ 2010.01.26
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사리를 모셨다.'는
글이 보입니다.
방문 위,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의 한 구절은 무소유의 노래였지요.
스님의 마지막 선물인 '책갈피'를 하나 들고
감로암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17년의 불일암 생활에서 스님은 얼마나 많이 이 길을 다니셨을까 생각하니 이 소박한 길까지도 감동적입니다.
조계산의 아름다운 단풍과
맑은 가을 속을 걸으면서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신 스님을 다시 뵙고 싶었네요.
송광사 산내 암자인 감로암의 무량수전과 그 앞의 '원감국사비'를 지나면서
위에서 아래로 거꾸로 송광사를 돌았습니다.
정자 같은 '무무문'을 지나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한 부처님과 10대 제자, 16 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승보사찰인 이 절의 상징, '승보전'과
'관음전'을 거쳐
대웅보전에 왔습니다.
송광사(승보 사찰)는 통도사(불보 사찰)와 해인사(법보 사찰)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사찰의 하나로
선종을 이끄는 중심 사찰입니다.
대웅보전 옆에 있는 송광사 3대 명물 중의 하나라는 '비사리구시'는
18세기 후반, 느티나무 고목으로 만들었다는 용량 2600여 리터의 대형 목그릇.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공양밥을 퍼 담아 놓았던 밥통이라 하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송광사가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네요.
대웅전 외벽의 벽화 중에서
이심전심의 '염화미소'와 깨달음의 단계라는 '인우구망'에 끌려 사진으로 가져왔습니다.
삼청교 위의 우화각을 보며
일주문으로 나왔으니 송광사의 첫 관문을 제일 늦게 만난 거였네요.
석양의 시간, 모든 건물을 다 둘러볼 욕심을 접고 그냥 돌아섭니다.
진리의 세계에서 다시 세속으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