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일원을 도는 4박 5일의 여행입니다.
청주에서는 먼저 '고인쇄박물관'을 찾았지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직지'를 만날 수 있는 곳,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이 간행된 흥덕사 자리에 세운
'고인쇄박물관'입니다.
'직지'는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경', '직지' 등으로 부릅니다.
'직지'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名句)에서 나온 것으로
중심 주제는
'참선을 통하여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할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직지'를 편저한 백운화상의 법명은 경한(景閑, 1298∼1374)
1351년(충정왕 3, 54세) 5월, 중국의 석옥(石屋) 선사에게 불법을 구하고 그에게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전해 받은 후
1372년(공민왕 21, 75세) 성불사에서 그 책의 내용을 보완,
과거 7불과 인도의 28 조사, 중국의 110 선사 등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 권으로 편집, 저술합니다.
백운화상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은 스승 입적 후 그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묘덕의 시주를 받아
1377년 청주목(淸州牧)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그 '직지'를 인쇄, 배포하였지요.
이 '직지'는 독일의 금속 인쇄본인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2년 앞선 것으로
금속활자로 찍은 책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200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그 '직지'는 상·하 두 권 중 하권만 남아 있고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 문헌실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주한 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우리나라의 각종 문화재를 사들이면서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
그 후 여러 경로를 전전, 1901년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 서지' 보유판에 수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실물과 내용은 확인되지 않다가
'드루오 경매'에서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에 직지를 구입,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고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의 기념행사인 '책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답니다.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1923~2011)는
거기서 만난 이 금속활자본, '직지'를 사진으로 찍어 우리나라에 보냈고
영인본(사진본)을 발간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국내에서 '직지'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1985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 터를 발굴, 직지의 간행 기록에 나오는 그 절터임을 확인하였지요.
학계의 인정과 함께 청주시에서는 1992년, 흥덕사 터의 정비와 함께 '청주 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합니다.
'직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2000년 청주 인쇄출판박람회'가 열리면서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거기에 박병선 박사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외규장각의궤'를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발견, 그 내용을 정리하며 반환의 기반을 마련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간단체와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끈질긴 요청을 보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145년 만인 2011년 5월, 5년마다 대여 기간을 갱신하는 조건으로 현존하는 297 책을 '빌려오게' 됩니다.
우리의 유물은 여전히 프랑스에 소유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매되어 유출된 '직지'는 아예 반환 요청도 할 수 없었답니다.
국가에서는 1999년 은관 문화훈장,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사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 고군분투했던 그분의 노고에 보답하였습니다.
의궤는 '조선 시대 큰 행사가 있을 때 참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 과정을 그림과 글로 적어 남긴 의례의 본보기 책'입니다.
박물관에서는 그 '직지'의 영인본과 남아 있는 목판본을 이용, 금속활자 3만 여 글자를 만들어 상 하권을 복원,
인쇄하여 책으로 엮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끝 부분, 왼쪽으로
선광 7년 정사년 7월(1377년 7월)에 청주목외흥덕사(청주 흥덕사)에서
묘덕의 시주로 석찬과 달잠이 주자인시(금속활자로 인쇄)하였음을 알리는 글자와
오른쪽 말미에 2015년 을미 12월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인 금속활자장 임인호가
직지 활자를 복원하였음을 알리는 글자가 보입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세계의 인쇄문화 연표에서는
최초의 금속활자 탄생과 그 이후를 볼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와 고려의 목판에 이은 초기의 금속 활자는 글자의 모양이 다소 미흡하였지만
목활자와 비교하면 그 성능에서 현저한 차이가 보입니다.
이러한 금속활자의 발명은 정보의 기록과 확산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면서 인류 문화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유럽에서는 우리보다 늦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전 세계로 전해지면서 그 이전까지 소수 지배계급이 누렸던 지식, 정보들이 대중화되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정비된 금속활자로 다양한 책을 빠르게 많이 인쇄, 국가의 운영과 발전, 정보와 지식의 확산에 기여합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03년(태종 3년)에는 주자소를 설립,
1900년대 초반까지 500여 년간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주조와 인쇄 활동을 주관하면서
훈민정음으로 만든 한글 활자와 개선된 목활자 등 다양한 형태의 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후기에는 서원이나 사가 등에서 개인 시문집 등을 만들 정도로
인쇄는 일반적인 문화로 발전하였습니다.
'직지' 홍보의 즐거움, '미디어 아트로 만나는 직지'에서
첫 번째 공간(증강현실 인터랙션 체험)에서는
직지의 내용이 담긴 세 가지 이야기 중 조판할 내용을 고르고 손으로 화면에 떠다니는 활자들을 선택,
빈 활자 틀에 넣으면 '증강현실 사진 촬영'으로 직지의 한 구절이 나오는 나만의 포토 앨범을 만들 수 있고
두 번째 공간(모션 인식 인터랙션 체험)에서는
그 앞의 내 움직임을 인식, 한자 활자가 한글로 바뀌면서 내 형체를 만드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세 번째 공간(활자 미디어아트)에서는 활자들의 현란한 움직임을 담은 '미디어 아트'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모빌 전시,
그림과 인형으로 설명하는 인쇄 과정과
곁들인 '문자의 뿌리'까지 전시 내용과 방법은 아주 다양하였습니다.
6000년 전의 '쇼베 벽화'에서
초기의 문자를 시작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이집트의 성각문자, 중국의 갑골문자의 3대 언어에 뿌리를 둔 전 세계의 글자 전시도
흥미로웠지요.
박물관 안내소에는 해설사가 상주하여 언제든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연중 09:00 ~ 18:00. 매주 월요일은 휴관, 무료관람입니다.
박물관 외벽도 직지의 활자들로 띠를 둘렀네요.
그 옆의 흥국사지로 가서
치미가 있는 작은 금당과 탑이 복원된 주변을 걸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가 인쇄되었던 역사적인 장소라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분들은 불심으로 만들었던 경전 인쇄가 인류 문화발전에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요?!
근대 이후의 인쇄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근현대인쇄전시관'과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금속활자 인쇄방법을 직접 해 볼 수 있고 간단한 직지 기념품도 살 수 있습니다.
올해 9월에는 코로나 19로 일시 중단되었던 '직지 문화제'가 다시 열릴 예정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성공적인 잔치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거기에서 상당산성으로 이동, 남문 주차장의 '동남방 수구터' 연못을 지나
제8주차장에 주차.
상가를 지나
성곽에 올랐습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의 백제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의 산성으로 둘레 4.2 km, 높이 4~5m의 거대한 석축산성,
천년고도의 위용을 드러내는 청주의 대표적인 건축입니다.
백제 때의 토성으로 추정되며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 1716년(숙종 42)에 석성으로 고쳤습니다.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 3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성벽에 다락이 없이 만들어 놓은 문), 치성(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는 장소) 3개와 수구(물이 흘러들거나 나가는 곳) 3개소의 이 성 안에는
현재 농사를 짓는 사람과 관광업에 종사하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답니다.
상당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길에 올라
1992년에 복원된, 조선 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는 '보화정(동장대)'을 거쳐서
동문인 '진동문'과
동쪽의 암문을 지났습니다.
성벽길과 달리 안쪽에도 길이 있습니다.
오전의 비가 갠 날씨, 짙은 녹음 속에서 즐기는 기분 좋은 산책이었네요.
이 길에서 북쪽으로 들어서면
멀리 이웃 도시와
북쪽 수구,
우리 숙소인 '상당산성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2km 거리의 능선길이 있습니다.
서쪽 방향으로 접어들어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청주 시내를 보면서
서문인
'미호문'과
암문을 지났지요.
내리막길 끝에는
1977년 복원된 남쪽의 '공남문'이 있습니다.
2시간 정도 한 바퀴 돌아 도착한 바로 앞은 9 주차장.
상당산성은 성남의 남한산성 못지않은 시설과 정비로 청주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귀중한 우리의 유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