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보은

좋은 아침 2022. 7. 19. 16:37

보은에 있는 속리산으로 가면서 

 

 

말티재를 지납니다. 

 

 

말티재는 '높다'는 고어 '마루'에서 나온 이름으로 '높은 고개'라는 뜻.

 

 

 전에 없던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과 

 

 

전망대가 맞아줍니다.

2020년 개장했다는  2층의 이 전망대는

 

 

구불구불 열두 굽이의 말티고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자리에 있었지요.

 

 

 

이어 만난 정이품송은 어느 해인가의 폭설에 왼쪽 가지가 부러지면서

 

 

그 위엄을 잃었습니다.

세조(1455~1468)가 속리산 법주사 행차 때 이 나무 밑을 지나는데 어연이 걸리지 않도록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신통한 이야기의 소나무.

감동한 임금은 이 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답니다.

 

 

화려한 연지를 거쳐

 

 

도착한 호서제일가람, 속리산 법주사입니다. 

 

 

법주사 삼거리에서 우선 '세조길'로 들어섰습니다.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들렀다가 속리산 법주사에서 세심정을 지나 복천암까지 올랐다는

이 계곡길은 이제 야자매트와 나무 데크로 잘 다듬어 놓은 편도 3.2km의 산책길, '세조길'이 되었습니다. 

 

 

달천과 

 

 

저수지를 보며 걷는 숲길.

 

 

 

비가 내리면서 걷는 사람이 거의 없던 이 숲은

 

 

구름과 안개로 덮인 침잠의 세계였습니다. 

 

 

당 태종이 등장하는 명소,

 

 

수정봉을 지나고

 

 

 

약사여래의 월광태자가 나오는

 

 

 '세조의 목욕소'를 지났습니다. 

 

 

속리산 천왕봉의 세 물줄기가 시작되는 경계, 삼파수,

천왕봉의 빗물이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남쪽으로 흘러가면 금강, 서쪽으로는 한강을 이룬다는 삼파수를 지나면

 

 

            길 역시 세 갈래로 나뉘는 지점, 세심정이 나옵니다. 

 

 

여기서 문장대(1054m)와 비로봉을 거쳐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058m), 신선대(1028m)로 길이 나뉘고

비로봉 길에서는 태조가 찾았다는 상환암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조길의 끝인 복천암은 문장대 방향.

 

 

                 이런 이름은 처음인, '이뭣고 다리'를 지나 

 

 

'왕이 다녀간 복천암' 타이틀의 작은 암자에 도착하였습니다. 

고려의 공민왕도 다녀갔답니다. 

 

 

그러나 명성과 달리 좁은 비탈에 세워진 

 

 

                유서 깊은 이 작은 암자는 

 

 

뜰이 아름다운 한가로운 절집이었지요.

숲과 물이 어울린 멋진 경치 속을 걸었지만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후덥지근한 날씨,

약수를 마시며 흘린 땀을 식힌 후 법주사로 내려갑니다. 

왕복 2시간 30분의 산행입니다. 

 

 

법주사는

통일신라 진흥왕 14년(553),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의신 대사가  불도를 펴기 위하여 속리산에 세운 대사찰로

'관음봉(983m)부터 최고봉 천왕봉(1058m)까지 일곱 개의 우람한 화강암 연봉 아래의 넓은 분지에 자리 잡은 절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일대'는 중요문화유산으로서 인정받으며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이자 명승 61호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법주사를 비롯한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의 7개 전통사찰이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수행자의 삶과 문화를 포함한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한국의 전통 산사(Traditional Buddhist Mountain Temples of Korea)'로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요.

 

법주사는 시대를 달리 한 많은 왕들과 인연이 깊은 고찰로

고려의 숙종은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법회를 열었고,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찾았답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기도를 위해 상환암을 찾았고,

세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복천암을 오가면서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쌍계사처럼 직선으로 연결된 절집.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대웅보전이 나옵니다.

 

 

그 앞의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

 

 

국내 유일의 목탑인 팔상전은 국보 제55호로

국보 2점에

 

 

대웅보전과 석련지,

 

 

거대한 금동미륵불상,

 

 

고려시대의 철당간지주 등 보물 13점을 보유하고 있는 대사찰입니다. 

 

 

절 마당의 예쁜 단청 속 범종루의 쇠종과 북, 운판과 목어는 언제 보아도 즐겁습니다. 

 

 

부도전을 일별 하면서 소나기를 피해 급히 내려갑니다. 

 

 

오후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격전지 중 하나인 북실마을 언덕에 조성한 '동학농민혁명공원'에 왔습니다.

 

 

주차장의 동학농민혁명 기념비를 보면서

 

 

위령탑으로 가는 죽림 광장의  '꼭 지켜야 할 동학의 덕목'은 실질적이면서도 아주 소박했지요.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 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할 것이다.

둘째, 하루 세 끼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러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 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 데에나 뱉지 말라.

         길을 모르거든 반드시 물어라. 그렇게 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시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생각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결국 무위로 끝났던, 1차 농민전쟁 이후 조정과 맺은  '12개 조 폐정개혁안'도 있습니다. 

 

①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씌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게 할 것

⑦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⑨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⑩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전봉준의 유시, '殞命(운명)' 비에는 그의 절망이 담겨 있었네요.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전봉준은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2년 고부 지방의 접주가 되면서

1894년 5월의 1차 농민전쟁을 이끌었던 투사였습니다. 

체구가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을 가졌던 전봉준, 후에 녹두장군이라 불렸던 그는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을 몰아내려 봉기했던  11월의 2차 봉기에서 패배, 죽임을 당했지요.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상징하는 듯 지그재그 12 구비의 나무 계단길, 

 

 

하늘계단의

 

 

중간중간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안내판이 보이고 

 

 

정상에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을 위로하는 기념비,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이 있습니다.  

1894년 우리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은 그들을 몰아내고자 다시 봉기합니다. 

그해 11월,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전략상 중요한 우금티를 놓고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과 전봉준의  병력이 합류한 3만여 명의 농민군은 

일본군 200명과 2500명의 관군과 대치, 총공격에 나섰지만 

47회에 걸친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는 처절한 공방전은 끝내 화력의 열세로 무너지면서

이후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에 의한 무자비한 살육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탑 뒤쪽에는 무명의 동학농민군이 남긴 애절한 기록도 보였지요.

 

 

탑에서 왼쪽에 있는 '빛의 계단'으로 내려오면 양옆으로 '통곡의 벽'이 있고

 

 

거기에는 동학과 관련된 내용이 사진과 함께 게시되어 있습니다.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후천개벽 사상과 함께 ‘마음속에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을 창도 했던 최제우가 1864년 조정의 탄압으로 대구에서 처형당하고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동학이 여전히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경상도와 강원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순회,

포교활동을 하면서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세력을 확장합니다. 

 

 

1890년대 들어 동학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탄압받는 교도들 또한 많아지면서

동학 교도들은 이러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한 방법으로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게 교조가 억울하게 처형되고 동학이 사교로 박해를 받고 있으니,

그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신원하였으나 실패로 끝납니다

1893년 1월, 당시 동학 포교의 중심지인 보은 장내리에 동학대도소를 설치한 것은

고종에게 올리는 복합상소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답니다.

그해 2월, 포교를 공인받기 위한 '광화문 상소운동'은 실패로 끝나지만

한양 땅에서 이들은 외세와 조정의 무능으로 국가 상황이 바람 앞의 등불임을 절감하면서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전국의 동학교도들을 규합, 보은 장내리에서 집회를 열면서 

외세를 배격하자는 '척양척왜'를 동학의 목표에 추가합니다. 

 

 

1894년 11월, 농기구들로 무장하고 보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들은

손병희의 지휘 아래 전봉준의 호남 농민군과 합세,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우금티 전투에 임했지만

계속 밀리면서 결국 해산을 결정,

 

 

살아남은 사람들은 12월, 출전의 땅이었던 보은으로 돌아왔으나

숙영지인 북실마을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과 민보군에게 공격을 받으면서 마지막 항전에 직면,

25000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마을 사람들이 무참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후 동학은 종교단체인 천도교로 등록하여 일제의 탄압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은 인간 평등의 실현, 사회비리의 척결, 외국 침략세력의 배척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12개 조 폐정개혁안'을 실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무능한 조정이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오판은 청일전쟁을 야기했고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이 땅의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유생과 백성들이 그들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로 끝났습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이후 계속되는 일제 침략에 맞서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북실마을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둘레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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