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에 도착, '옛길박물관' 가까운 제1주차장에 차를 둔 다음
간단한 배낭 차림으로
'문경새재 옛길 보존기념비'와
바람직한 선비,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한 '선비의 상' 앞을 지납니다.
문경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의 '초점',
동국여지승람에는 '새들도 쉬며 넘는 힘든 고개'라는 뜻의 '조령'으로 기록된 곳으로
조선 태종 때 주흘산(1106m)과 조령산(1026m) 사이의 이 새재 계곡에 영남대로가 설치된 이래
'이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며 사회, 경제, 문화 등 문물의 교류지, 국방상의 요충지가 되었고
한양 과거길을 오르내리던 선비들의 꿈이 담기며 백성들의 삶과 땀이 서린 고갯길'이 되었습니다.
이후 제3관에서 650m에 이르는 고갯길을 닦아 문경에서 괴산의 연풍을 잇는 대로, '연풍새재'가 개통되면서
영남대로에서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가 됩니다.
오늘은 관리사무소에서 시작, 제1관문에서 제2관문까지 3km. 제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3.5km를 걷고
제3관문에서 근처에 있는 숙소, 조령산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갈 예정.
제1관문인 '주흘관'으로 가는 숲길은
이슬비가 내리면서 초록빛이 더 짙어졌습니다.
1907년 조선 숙종 때 세워진 제1관문인 '주흘관'을 거쳐
1896년부터 1907년까지 의병항쟁 활동에 나섰다가 일본군에 죽임을 당한 문경 출신의 애국지사,
운강 이강계 선생을 추모하면서
촬영기사가 서 있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그 안으로 연결되는 왕건교 옆에 지났습니다.
이 길은 새재를 넘어 소조령까지 연결되는 '새재길(관광안내소 ~ 소조령, 9.1km, 3~4시간)'의 일부로
지루할 틈도 없이 길가에는 볼거리, 읽을거리들이 많습니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이제는 새롭게 보였네요.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새 이름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부끄러워하면서
길가 바위에 새긴 무수한 선정비, 선양비, 불망비들을 거칩니다.
옛사람들이 쌓은 인공의 돌산, 조산도 보입니다.
선조들은 풍수지리적으로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들어 그 땅의 부족함을 보강했다지요.
여기 문경지역에서는 조산을 '골맥이 서낭당'으로 부르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었답니다.
돌담이 보이는
조령원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공무로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에서 운영하던 여관으로
지금은 약 600평의 장방형 터만 남아 있지만 조만간 문경시에서 그 안을 복원할 예정이라네요.
새재 안에는 이 조령원 외에 동화원과 신혜원까지 모두 3개의 원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파전과 동동주를 마셨던 추억으로 주막을 기웃거렸지만
코로나 19 탓인지 지금은 사람의 자취도 없이 초가는 무너지기 직전.
이 길을 오가던 많은 시인묵객들은 저마다 그 흥겨움을 시로 남깁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만나서 업무를 인수인계하였다는 교인처, '교구정'에 도착하였습니다.
1470년에 건립, 사용하다가 189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시에서 복원하면서
해마다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진행한다지요.
교구정과 역사와 함께한 고령의 소나무는 여전히 당당.
바로 앞에는 두 분, 감사나으리들이 알려주는
'용추(龍湫)'라 쓰인 바위틈의
용추약수에
근처 넓은 바위가
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음을 알리는 홍보판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산불됴심' 비석의 예스러움도 재미있었네요.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화강암 자연석의 한글비는 국내에서 유일하다지요.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조곡폭포' 근처에는
'기도굴'이 보입니다.
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신부가 이 새재 입구에서 순교한 후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기도굴이랍니다.
길가 소나무에는 일제 강점기 말, 전쟁 물자를 조달하려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종일 이슬비가 내리면서 산 봉우리는 구름과 안개로 덮였지요.
1594년 조선 선조 때 설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면서 만난
문경새재 아리랑과
이곳이 문경 8경의 하나임을 알리는 '새재 계곡비'도 반가웠네요.
계곡의 거친 물흐름도 시원스럽습니다.
아, 그러나 여기에도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문경새재옛길인 영남대로 중에서
동화원 터과 제3관문인 조령문까지 1.2km는 별도로 '장원급제길'로 불립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지나갔던 길이라서 붙은 이름이라네요.
그 동화원 터를 거쳐
낙동강 발원지에
왔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낙동강의 근원은 세 군데로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 문경현 초점, 순흥 소백산에서 시작되어
상주에서 합수, 낙동강이 되어 흐른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제각각 소원을 빌며 쌓았다는 소원성취탑을 보며
군막터를 지나니
드디어 나타난 1907년 조선 숙종 때 세워진 제3관문, 조령관!
오늘 걸은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입니다.
길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을 살피며 걸었던 6.5km의 완만한 숲길에서는
내내 이슬비가 내렸지만 덥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조령관에서 소조령(고사리마을)까지 남은 거리는 2.2km.
조령관 뒤쪽에 조성된 정원에는 이곳이 백두대간의 조령임을 알리는 비석과
과거길에 나선 젊은 선비의 모습이 보입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 가운데 새재까지 셋.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는다며 두 길을 꺼리던 영남의 유생들은
문경(聞慶)이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굳이 돌아서까지 문경의 이 새재를 넘었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의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요.
암행어사 박문수가 새재를 넘다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다는 전설을 받쳐주는 마패에
과거에 급제했던 선비들이 남긴 저서, 이익의 '성호새설'과 정약용의 '목민심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책 모형도 보입니다.
제3관문인 조령관에서 소조령까지는 '연풍새재'라 부르는 길,
일제 강점기에 이화령 쪽으로 신작로가 확장되면서 이 길은 중요 도로로서의 기능을 잃고 잊혔다가
2013년 도에서 복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설명의 '연풍새재비'도 있습니다.
오늘은 느긋하게 3시간 정도의 문경새재를 걷고 연풍새재 옛길가에 있는 숙소,
괴산과 문경의 경계에 있는 조령산자연휴양림에 들어왔습니다.
새재길의 남은 거리는 여기서 1.3km..
조령관문 인근, 해발고도 600m의 서늘한 휴양림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날은 1시간 반 정도 다시 걸어내려가 새재 입구에서 더덕정식으로 괜찮은 점심을 먹은 후
충주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