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입니다.
남한강에 댐을 만들면서 생긴 탄금호, 호반에는 '청정삶터, 물의 도시 충주'라는 타이틀이 보입니다.
여기서는 국보 제6호인 그 옛날의 '중원탑'이 궁금했지요.
중원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 중 제일 높은(12.95m) 7층 석탑으로
신라 원성왕 때 한반도의 중앙인 이곳에 조성되었답니다.
그러나 충주시가 팽창하면서 중원군은 시에 흡수되어 이 탑의 이름도
'중앙탑',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불려지고 있었네요.
중앙탑이라는 흔한 일반명사, 행정구역상의 이름보다는
중원탑이라는 예전의 이름이 더 어울리는 듯해서 서운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해체와 복원을 거듭하면서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졌답니다.
호반의 중계다리에는 색색의 야간조명을 설치, 화려한 '탄금호 무지개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도 1.4km, 탄금호반의 이 무지개길을 산책하고 싶었지만 비바람이 거칠어지면서 곧 철수,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이름을 가진 실내로 들어왔습니다.
여기 전시된 비석은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유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이 되어 고구려의 충주 점령을 상징하면서
이 지역에 서 있었습니다.
1979년 2월, 인근의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이 비석을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알고 판독을 시도했지만
4면에 새긴 비문은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글자 수와 전문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네요.
그러나 '전부대사자', '제위', '사자' 등의 고구려 관직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고모루 성' 등의 이름에
'매금', '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단어들이 나오면서 고구려비임이 확인되고
곧 국보제 205호로 등재되었지요.
이 비석은 충주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흔적인 '봉황리 마애불상군', '장미산성 사적'과
청주박물관에 소장된 '건흥 5년이 새겨진 금동광배'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고구려의 존재와
5세기, 고구려가 신라 땅을 점령하면서 주종관계에 있었음을,
불교 등의 고구려 문화가 백제와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고구려의 관등 조직이나 인명 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신라의 이두가 고구려의 이두식 표기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리고 있었네요.
중원 지역은 고대사의 공백지대로
뒤늦게 발견된 이 고구려비가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유물이 된 것이지요.
삼국시대 내내 한강 유역은 각축전의 땅이었지만 고구려의 세력이 여기까지 진출했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네요.
고구려의 장수왕은 북방 세력과는 평화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진정책을 추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라와 백제에 간섭합니다.
이에 맞서 두 나라는 나제 동맹을 체결하였지만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마저 전사한 백제는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임진강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그 기세로 한강 상류인 충주를 넘어 금강 유역까지 진격하여
5세기 후반에는 신라의 남한강 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는 영토의 최남단인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남방 경영의 전초기지로 활용합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 이면에는 충주가 철제무기나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철 생산지였기 때문이었고
이 지역을 점령한 후 개마무사 부대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이에 따라 고구려의 세력도 커져갔답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으로 개마에 탄 5만 명의 기병을 개마무사라 불렀다지요.
개마무사들은 공격 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 시에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 되어
적의 화살이나 창의 공격을 막아내는 강력한 전투력으로
광개토대왕이 벌이는 정복사업의 주력이 되면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답니다.
개마무사를 기마병으로 활용한 것은 고구려가 질 좋은 철을 많이 생산하는 땅을 확보했고
거기에 뛰어난 제련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말까지 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던 고구려는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네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하여 장군총과 무용총 등 많은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12.4m, 한 밑변의 길이가 31.6m가 되면서 '동방의 피라미드'가 부른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결과적으로 위협을 느낀 신라가 당을 불러들였고
거기에 고구려는 연개소문 가문의 분열로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지요.
전시관 밖에는 전망대가 있고
고구려의 상징, 금빛 삼족오에
고구려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색과 그림의 타일 벽화로 이루어진 연대길이 있습니다.
막강했던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이루어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토와 역사는 많이 달라졌겠지요?
아쉬움을 남기며 탄금대로 갑니다.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3km 지점의 명승지,
오대산에서 발원한 북쪽의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시작된 달천강이 합수하는 지점의 탄금대는
해발 100m 정도의 나지막한 언덕입니다.
가야의 악성 우륵이 신라로 망명,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타던 곳,
임진왜란 때 팔도 순변사 신립장군이 순절한 곳입니다.
입구에서 '탄금대의 유래'를 읽고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에 안내판과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가 나옵니다.
열두대로 내려가는 도중에는
'팔천고혼위령탑'이 임진왜란 당시 여기서 왜군에 맞서 싸웠던 8000여 명 군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2층 누각, 탄금정 옆에는
1954년 충주의 역사와 지리, 인물과 자연환경을 예찬하는 높이 183cm. 폭 66cm의 비석,
육당 최남선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탄금대기'가 있습니다.
정자에서 강 쪽으로 계단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두물머리 명소,
'열두대'가 나옵니다.
이곳에는 박재륜의 글에 박충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지비’가 서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한 수 만의 왜적을 맞아서 팔천 군사와 함께 싸우다가
47세의 일기로 순절했음을 알리는 비석입니다.
'열두대'에는 이곳에서 가야금을 탔던 우륵의 가야금 현이 열두 줄이기에 붙인 이름이라거나
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며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붙은 이름이라는 등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네요.
거기에서 충주를 가로질러 '충주호 종댕이길'에 왔습니다.
'종댕이'라는 말은 근처의 상종, 하종 마을의 옛 이름에서 유래한 길로
계명산 줄기인 심항산을 한 바퀴 돌고 충주댐까지 걸어가면서
충주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총 11.5km, 약 4시간 30분 거리인 산책로입니다.
3개 코스로 나누어 진행할 수도 있지요.
'마즈막재'에 제1, 2 주차장이 있고 거기에서 1.5km를 걸어오면 심항산 숲해설안내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댕이길'은 종댕이산이라 부르는 심항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처럼 전체 길에서 3.8km,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심항산 둘레길만 걸을 경우에는
숲해설안내소까지 와서 그 앞길에 주차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초록의 숲과 물이 어우러진 길.
충주호를 바라보며
기본 좋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입니다.
충주호의 별을
만날 수도 있었지요.
한 번 넘을 때마다 건강수명이 한 달 늘어난다는 속설의 '종댕이 고개'를 넘어
'밍계정'과
'제2조망대'를 지났습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햇빛.
장마철의 잿빛 하늘 대신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 아래 반짝거리는 수면을 보고 싶었거든요.
상종 마을로 가는
출렁다리를 보면서
방사탑을 지나면
다시 숲해설안내소가 나옵니다.
충주에서는 이 지역에 내린 호우주의보에 비가 거칠게 내리면서 정작 보고 싶었던 '신경림의 시비'를 놓쳤습니다.
누구 이 길에 나선다면 꼭 들르세요.
남한강 목계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몇 백 미터를 지나면
엄정면 목계리 옛 목계나루에 신경림의 시비, ‘목계장터’가 있습니다.
화강암의 직육면체 자연 대리석을 다듬어 판화가 이철수의 글씨로 음각했답니다.
목계 장터/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