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서산, 2

좋은 아침 2021. 10. 25. 09:19

통영과 거제를 떠나는 상경길에

모님 묘소와 이 고장 불교계 고승의 흔적을 찾아 천장사와 부석사, 간월암을 둘러보려고

충남 서산에 왔습니다. 

먼저 꽃다발을 들고 부모님께 인사드린 다음 향토 음식인 꽃게장으로 점심을 먹은 후

도비산(353m)의 부석사로 갑니다. 

 

 

남쪽 여행 내내 맑은 날이 드물었기 때문에 파란 하늘과 온화한 날씨가 반가웠지요. 

 

 

서산의 浮石寺, 간월암, 천장사는 

험난한 일제강점기를 견디어야 했던 이 지역 백성들에게 등불과도 같았던 

경허(1846~1912) 스님과 만공(1871~1946) 스님, 두 분의 자취가 서린 순례지입니다. 

 

먼저 부석사입니다.

금강문을 지나 

 

 

 

이곳을 찾은 경허가  머물렀다는 심검당부터 찾았습니다. 

 

 

부석사의 심검당('지혜의 칼을 찾는다')과 목룡장('용처럼 비범한 인재를 키워낸다')의 현판은

경허가 직접 썼고 

 

 

부석사 현판은 만공의 작품입니다.

 

경허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로 

정신을 가다듬어 번뇌를 버리고 진리를 생각하며 무아의 경지에 드는  '禪'의 생활화, 일상화를 모색,

근대 禪의 물결이 다시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일제의 탄압에 대항, 단발령에도 오히려 머리와 수염을 기르면서 당당하게 맞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만공은 경허의 제자로 

조선총독부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정책을 펴자 우리 불교를 지키려 정면으로 대립,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20년대에는 선학원 설립에 참여, 선승들의 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契 모임, 선우 공제회를 만들었으며

1941년에는 전국고승법회를 개최, 계율을 지키며 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던 분입니다. 

 

 

부석사는 절 규모가 작지만 

신라 의상의 창건한 이후 조선의 무학이 중창했다는, 역사가 깊은 절입니다.

‘제2의 원효’라 불릴 정도로 무애행을 하던 경허는 이 절에서 수행하던 제자 만공을 찾아  자주 왔었다지요.

절 뒤쪽, 마애불 근처에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있습니다.

 

 

 

이 절 이름과 창건설화 모두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설법전 외벽에 그림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에 유학, 지장사에서 공부하는 의상을 본 선묘 낭자는

귀국길의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했답니다.  

절망한 낭자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이후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보호해 주었다네요. 

귀국 후 의상은 낭자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도비산에 절을 짓기 시작했지만

동네 사람들의 반대 시위로 공사가 중단되는 상황이 되자

낭자가 큰 바위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꾸짖어 회개 시키면서 

절 앞의 바다에 떠서 공사 진행을 지켜보았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이 물 위에 떠 있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고 절 이름을 부석사라 했다지요.  

 

실제로 절 앞, 천수만 안에 있는 검은 여(검은 바위, 서산시 부석면 갈마리 소재)는 

하루에 두 번 밀물 때마다 그 일부가 물에 잠겼고

그 광경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浮石’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가 있는 이 지역의 지명, 부석면도 여기서 유래되었답니다.

 

 

 

파란 하늘 아래 간척지의 넓은 논이 내려다보이는 평화로운 경내. 

세월 탓에 한가로워진 절집에서 '다원'의 '운거루'는 참 운치 있는 장소였네요.

 

 

 

이 절은 2012년 일본 쓰시마 섬 관음사에서 한국인 절도범이 국내로 밀반입했던 '금동관음보살 좌상'의 원 소장처.

현재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측과 장기간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 문화재의 진위 여부 판정과 더불어 재판이 빨리 종결되어

'금동관음보살 좌상'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바라면서 간월암으로 갑니다.

 

 

부석사에서 18km 거리의 간월암으로 가는 길에는 갯벌을 막아 만든 간척지 논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소중한 갯벌을 메우면서 만들어진 이 소중한 논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간월암(看月庵)은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작은 절.

여기도 경허와 만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부석사의 도비산 지맥이 이 간월암까지 이어지면서 두 절은 사제의 인연, 땅의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썰물로 드러난 길을 따라 간월암으로 들어갑니다.

만공은 1942년에 쇠락한 간월암을 중창 불사, 간월암 현판도 직접 썼답니다.

이후 천일기도에 들어가 태평양 전쟁 당시 승려에게까지 창씨개명과 징집을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본 순사들의 접근이 힘든 이 외딴 절집에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렸다지요.

그 기도가 통했는지 천일기도가 끝난 3일 후,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았습니다.

 

 

용왕각이 보이는 이 서해의 

 

 

간월암은 썰물 때 하루에 두 번, 육지와 연결되는 섬으로

바다의 일몰과 일출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명승지입니다.  

10월 14일 현재 낮 간조 시간은 15:52. (바다 타임 - 간월도 항, 129번). 일몰은 18:00.

 

 

 

천장사로 가는 길은 멀었습니다. 

큰길에서 마을길로, 산길로 한참이나 가야 했던 연암산 중턱의 이 작은 절에는 

마지막까지도 급경사의 계단을 있습니다.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 역시 험한 비탈, 아래 주차장에 놓고 오라는 안내가 있었네요.

 

 

길 중간에 경허의 오도송, '불도의 진리를 깨달은 후 읊었다'는 시가 보입니다.

 

 

천장사(天藏寺)는 633년 백제 때 창건한 사찰로 

근현대 한국 불교계의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경허, 만공 등의 고승을 배출한 절입니다. 

''최인호의 문학의 금자탑, ‘길 없는 길’의 무대-천장암''이라는 표제의 바위에는 

‘이곳 연암산 천장암은 경허 대선사께서 18년간 주석하신 정신적 도량으로서 

그의 수법 제자인 수월, 혜월, 만공이 수행했던 곳'이라고 기록과 함께

작가 최인호가 그 내용을 주제로 소설, ‘길 없는 길’을 쓰면서

 천장암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전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소개글이 보입니다.  

 

 

경허의 수행처, 원성문 앞에도 소설의 일부를 인용, 전시하였습니다. 

 

 

최인호의 이 소설은 경허 스님의 삶을 조명한 소설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유품 중에 경허의 물건을 발견하고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선종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발전해 왔지만 조선시대 서산대사 이후에 그 맥이 끊겼고

경허는 1879년 나이 31세 때 이 천장사에서 들어와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우침을 얻습니다.

그러나 56세 이후에는 속인 생활에 들어가면서 64세에 타계했지요. 

그의 족적은 청계사 - 동학사 - 천장암 - 해인사 - 월정사 - 석왕사 - 평안도 강계 - 삼수갑산으로 이어지면서 

안변의 석왕사에 도착한 이후에는

승려가 아닌 늙고 병든 저잣거리의 엉뚱한 이름을 가진 중생으로 살았답니다. 

부처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부처에 머물러 있음은 자신이 부처에 얽매어 있음이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네요. 

원효 대사의 '무애행'이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의 기행은 많은 일화를 남겼지요.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이유입니다.  

경허를 주제로 한 이 소설은 한 인간의 인생 질곡을 여지없이 담아낸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창문 없는 가로 2.3m, 세로 1.3m의 1평도 되지 않는 이 작은 방은

경허(1849~1912)가 1년 동안 방문을 잠근 채 장좌불와(長坐不臥)한 끝에 원만하게 깨달음을 이루면서

원성문, 또는 원구문의 현판을 달았습니다. 

그는 누더기 옷 한 벌로 모기와 빈대에 물려 온 몸이 헐고 살이 벗겨지는 와중에도 치열하게 수행을 이어갔지요. 

 

 

그 옆에는 경허의 '3월'이라 불리는 수월(1855~1928)과  혜월(1861~1946), 만공(1871~1946)인

세 제자들이 수행 생활을 하면서 스승을 시봉 했던 월면당이 있습니다.

월면은 경허의 애제자였던 만공의 또다른 법명입니다.

 

 

‘천장암’이라 쓰인

 

 

인법당(승려가 거주하는 공간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의 공양간 쪽에는 

 

 

‘경허 열반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과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한국 불교를 지키고 중흥시킨

경허를 기리는 탑입니다. 

 

 

이 탑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경허의 법명인 성우를 사용, '성우당' 현판이 붙은 경허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설사도 문을 잠그고 퇴근한 늦은 시간이라서 들여다볼 수는 없었네요.

 

 

주련의 이해하기 어려운 경허 선시만 보고 왔지요.

 

 

 

비탈길로 하산하는 도중에는 ‘경허와 만공의 바랑이 쉼터’라는 표지판 붙은 널찍한 바위가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일깨워준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의 현장이었지요.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초지가 조성된 서산 한우 목장의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용현 계곡의 끝자락에 있는 용현 자연휴양림에 들어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임도를 따라 산책하면서 

조선 병인(1886)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속에 숨어들었던 교인들이 생업으로 숯을 구워냈던 숯가마터와  

 

 

가야산의 중심으로 사통팔달인 '퉁퉁 고개'를 만났습니다.

발을 구르면 퉁퉁 소리가 난다 하여 붙은 이름이랍니다. 

'백제의 미소길', '내포문화 숲길'과 연계되면서 많은 등산객과 탐방객이 찾아온다는 이 고개에는

 

 

작은 정자가 길손을 맞아 줍니다. 

 

 

체크 아웃 후

이 용현 계곡에서 백제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사찰, '보원사터'를 둘러보는 길입니다.

사찰 앞에 세워두는 깃대, 석조 당간지주와  

 

,

 

 복원된 5층 석탑,

 

 

 

승려 탄문의 부도인 법인국사탑과 탑비 등의 문화재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철조여래좌상'은 지금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높이 2.57m, 폭 2.17m로 박물관 소장 철불 중 가장 크다지요.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불교 수도 중에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늘어뜨리면서 다섯 손가락을 편 모양)의 형상 때문에

석가모니 불상이라 인정받았답니다.

 

 

현재 보원사터 옆에 새로 지은 보원사에서는

불상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 새롭게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습니다. 

 

 

근처 용현 계곡에 있는 '마애여래삼존불'을 찾아 200m의 경사 급한 산길로 올라갑니다. 

 

 

불이문을 지나서 만난

 

 

큰 바위 부조,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역사적, 미학적인 가치가 큰 불상이랍니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석불의 온화한 미소는 빛의 방향,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지요.

백제 후기(6세기 중엽)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국보 84호. 

개방 시간은 09:00~18:00. 7~8월은 21:00까지입니다. 관람료 무료. 연중 입장 가능.

 

 

중앙에 있는 여래입상의 높이는 2.8m. 좌측에 그보다 작은 관음보살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불상이었네요. 

 

 

서산의 일정을 마치고 들른 젊은 화가, 마진식의 '달빛 미술관(여미 다미방)'에서

 

 

                그림의 소재와 기법, 실험 정신 등 신선한 감각에 놀라고

 

 

 

수덕사 인근 식당의 산채 한정식에 감동을 받으면서 돌아왔습니다.     

입맛 까다로운 언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점심이었기에 소개합니다.

먹기 바빠 밥상 사진은 못 찍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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