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고창, 2

좋은 아침 2021. 4. 8. 16:53

고창에 있는 '미당 시문학관'은 

시인 서정주의 고향인 안현마을의 생가 근처,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 분교를 개보수하여

미당 사후 다음 해인 2001년 11월 3일에 개관하였습니다.

3개 동에 전시실, 서재 재현실, 영상실들이 있고 

전시실에는 미당의 육필원고와 시집 원본, 사진자료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미당 초상화며 

시화 도자기, 서적 등 유품 5,000여 점을 소장하여

미당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었지요.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개관시간 9:00~17:00. 매 월요일 휴관.

 

 

 '미당 시문학관' 이름 옆에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미당의 대표 시, '冬天'이 있습니다.

 

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었던'

 

 

미당의 생전 모습을 보며 전시실로 들어갑니다. 

 

 

미당이 발표했던 옛 시집들이 보이고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나옵니다.

 

 

미당의 시와 삶,

 

 

재현해 놓은 '미당의 서재'

 

 

미당의 유품 중 생전에 즐겨 쓰던 모자들을 보면서

하얀 두루마기에 베레모 차림으로 차분하게 강의하던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대학교 2, 3학년 때, 미당의 '시문학개론'은 필수였거든요.

고려가요의 양주동 교수, 평론의 조연현 교수와 함께 우리 학과의 긍지였지요.

 

 

자필 시,

'국화 옆에서'와 

 

 

'선운사 동구'에

 

 

미당의 대표작들이 등장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친일 시도 몇 작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시문학관 개관 후

일부 단체 회원들의 플래카드를 앞세운 거친 항의 방문 시위와

미당의 문학세계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일부 의견을 수렴하여

이 시문학관에 미당의 친일 작품도 소개하였답니다.

친일 행적은 선택의 한계와 생존이라는 절박한 그 당시 현실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옹호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오점은 1986년의 당시 권력자에 대한 송시였습니다.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

.

.

.          

.

 

 

권력과 권력자에게 휘둘렸던 우리의 대 시인이 서럽고 부끄러웠습니다.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의 혼'이었을까요? 

홈페이지는 현재 유해사이트라고 차단된 상태.  http://www.seojungju.com.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년, 85세로 고향에서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가슴에 한 송이 국화꽃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기사 제목에 가슴이 저립니다.

'그야말로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긴 위대한 시인이었지만

말도 안되는 송시는 안타깝게도 미당의 시 인생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미당의 시가 살아 있습니다. 

 

 

 

 

 

 

 

 

건물 옥상, '바람의 언덕'에서는

 

 

미당이 사랑했던 고향 마을과 

 

 

동네 뒷산,

 

 

줄포항이 보입니다.

 

 

시문학관에서 200m 거리,

동백꽃과 수선화,

 

 

유채꽃이 활짝 핀 곳에는

 

 

미당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1915년 5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이 집에서 태어난 미당은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중앙불교 전문강원 수학 후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들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는 등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미당의 시는 '동양적인 사상에 민족적인 정서를 세련된 시풍으로 읊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민족어의 가능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은 대 시인이었습니다.

 

첫 시집은 '화사집(1941)'.

그 시집에 등장하는 '자화상'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도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안채의 벽에는 미당의 '동천'이

사랑채에는 '선운사 동구'가 보입니다.

 

 

국화가 자라는 뜰에는 

'국화와 산돌' 시비가 있습니다.

 

 

국화와 산돌

 

산에 가서 땀 흘리며 줏어온 산돌

하이얀 순이 돋은 수정 산돌을

국화밭 새에 두고 길렀습니다.

 

어머니가 심어 키운 노란 국화꽃

그 밑에다 내 산돌도 놓아두고서

아침마다 물을 주어 길렀습니다. 

 

그동안 오른쪽으로 지붕이 보이는 집에 동생인 서정태 시인이 살면서 생가와 묘소를 돌보았지만

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그도 작년에 죽으면서 살던 집은 폐가가 되었다네요.

거기에 현재 여러 가지 이유로 시 문학관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한 듯하고

문화계에서도 금기어가 되어 아무도 미당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서에서 미당의 시는 모두 다른 이의 것으로 대체되어 

이제 젊은 세대는 미당과 미당의 시를 알지 못합니다.

동네에서 만난 한 노인은 '미국에서 의사질한다는 아들놈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습니다.

 

 

마을을 지나 건너편 언덕의  미당 묘소로 가는 길에도 

 

 

미당의 시비가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부부의 묘 앞에도 

 

 

평생 해로한 아내 방옥숙에게 바치는 시, '무등을 바라보며'의 일부가 나옵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그 앞에 술 한 잔, 동백꽃 한 송이 올리고

 

 

돌아서서 멀리 미당의 시문학관을 내려다보며

'친일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 활동한 예술인 중 친일에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언제까지나 미당의 시를 친일의 굴레에 가둘 수 없는 일이다'는 신경림 시인의 말을 생각합니다.

미당의 친일 행적에 대한 단죄보다는 당대의 상황을 파악하여

미당의 삶 전체를 균형 있게 평가, 그의 문학성을 우리 자산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세간의 조롱거리가 된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는 어찌해야 할까요? 

 

 

고향 질마재에 누워 있으나

미당의 영혼은 아직 편히 쉬지 못하고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네요.

 

 

지붕과 담에 국화꽃이 그려있는 미당의 동네, '시문학 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미당의 시를 좋아합니다.

왜 그러셨어요?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100리 벚꽃이 아름답다는 26번, 군산↔전주 간의 '전군도로'를 달리면서

 

 

다시 전주에서 서해고속도로의 벚꽃길로 상경하면서도

 

 

내내 우리의 대 시인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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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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