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무더위가 수그러들던 추분 무렵의 1박 2일 여행.
괴산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진천과 안성을 거쳐 귀가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괴산에서는 문광저수지의 은행나무길을 걸었고 산막이 옛길을 유람선으로 돈 다음 괴산 읍내의 홍명희 생가에 들렀다가 조령산자연휴양림에서 1박 후 진천의 농다리, 진천의 하늘전망대를 거쳐 돌아왔지요.
먼저 괴산 문광저수지 옆의 은행나무길입니다.
단풍철은 아니지만 고즈넉한 시골 마을의 산책길은 아주 좋았네요.
갈대가 우거진
둘레길에는 이런 그네도 있고
괴산의 자랑, 소설 속 주인공인 임꺽정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노란 은행잎 모양의 의자 뒤로는 괴산의 특산인 옥수수밭이 펼쳐집니다.
포토포인트에서 노랗게 물든 예쁜 길을 상상하면서
나무데크와
오솔길이 섞인 저수지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양곡정을 지나면
저수지의 긴 둑길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바라본 마을의 들판에는 어느새 추수를 앞둔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네요.
명승지의 유채밭 못지않은 풍경이었지요.
그 옆에는 2024년 갑진년을 맞아 풍요와 번영의 상징인 용을 표현한, 군민의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유색벼 5종을 심어 만든 멋진 논그림이,
뒤로는 우리가 걸어왔던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보입니다.
거기에서 나와 근처의 '산막이 옛길'로 왔습니다.
도공이 들어와 산막을 짓고 도자기를 굽던 마을의 옛길이랍니다.
충북 괴산의 칠성면 사오랑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된 7km의 이 산책길은
산과 물,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산막이 옛길이 끝나는 지점인 연화교에서는 '충청도양반길 2, 3코스'가 시작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날씨와 파란 하늘 배경의 해바라기를 반가워하며
산막이 옛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예전에 걸었던 길이라서
이번에는 유람선을 타고 괴산호를 지나 달천의 연화협 출렁다리까지 돌아볼 생각이었지요.
도선장으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코스모스와
개미취가 활짝 피어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네요.
괴산댐 도선장에서는 두 개의 선박회사가 번갈아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괴산댐이 만든 인공호수, 괴산호의 도선장을 떠난
유람선은
달천의 오른쪽인 '산막이 길'과
맞은편의 작은 다리에
과수원이 있는 '산막이 호숫길' 사이를 달렸습니다.
이어 산막이 마을의 도선장과
연천대 절벽 위의 정자 환벽정,
산막이 마을을 지났지요.
여기서 산막이길이 끝나고 연화협 출렁다리로 가는 달천변의 오른쪽에는 산책길, '각시와 신랑길'이 이어집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문신 노수신 (1515~1590)이 을사사화에 휘말려
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마을의 '수월정'을 보면서
연화협 위의 출렁다리 아래를 통과한 유람선은
도선장에서 다른 여행자들을 태우더니
선유대 옆,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두 손을 모은 모습의 각시바위와
건너편의 말을 타고 머리에 어사화를 장식한 형상의 '신랑바위'를 지나 다시 도선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싱그러운 강바람과 맑은 공기 속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네요.
괴산 읍내에는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 월북했던 정치인 홍명희(호는 벽초, 1888~1968)의 생가가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꺽정을 소재로 민중의 풍속과 그들의 토속어를 실감 나게 구사하여 그 당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렸답니다.
할아버지는 친일파였지만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를 지내다가 1910년의 경술국치, 한일합방의 치욕 끝에 자결.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시기에 동경에 유학하면서 유학생들 사이에 '동경 삼재(동경에 유학한 조선의 3대 천재)'의 하나로 칭송되었던 그는 일본 유학 중 아버지의 비보를 접하고 학업을 포기, 귀국합니다.
이후 친일노선을 걷던 이광수, 최남선과 달리 그는 1919년 고향에서 3.1 만세 참가,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언론계와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일경에 체포, 수감되었고 1928년부터 옥중에서 임꺽정을 집필, 조선일보에 연재하지만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13년의 집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중단하면서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을 당한 후에는 문학지 조광에 연재를 이어갔습니다.
1948년 김구와 함께 평양의 남북한 공동회의에 참석한 이후 북한에 남으면서 먼저 그쪽으로 이사시켰던 가족과 해후.
김일성의 신임을 받아 내각 부수상을 역임하는 등, 대부분의 월북 인사들과 달리 성공적인 삶을 누리면서 사후에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답니다.
홍명희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 소설을 미완으로 남겨 놓았지만 훗날 손자 홍석중이 소설을 완결하면서 대를 이은 창작이 되었지요.
홍명희의 사위로는 시인 소월(김정식)이 있습니다.
괴산군에서는 정부의 월북 작가 해금에 따라 그의 생가와 업적을 조명하려 했지만 지역 보훈단체들이 '월북한 빨갱이'임을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중부지방 양반 가옥인 그의 생가는 국가민속자료 지정에서 해제되어 계속 빈 집으로 남아 있다가 2002년 괴산군이 매입, 보수와 복원을 거쳐 다시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의 부친, 홍범식을 내세운 '괴산 홍범식 고가'로 이름이 알려집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논란 속에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낡은 집만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월북 음악가, 광주의 정율성과 더불어 기념사업에 논란이 있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ㅁ자형의 안채 옆,
쪽문을 지나면
ㄷ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옵니다.
빈 집, 퇴락한 뜰에는 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네요.
집 밖에는 '의사홍공범식추도비'가 서 있습니다.
오늘의 숙소인 휴양림을 찾아 가는 길에 '수옥온천'의 옆길로 들어서니 '수옥폭포'가 나옵니다.
높이 20여 미터, 수량이 풍부하여 입구부터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지요.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폭포 앞에는 정자, 수옥정이 서 있습니다.
조령 3 관문 뒤쪽의 숙소인 휴양림 안.
침대와 식탁, 천창과 족욕탕이 있는 입식 시설이 좋아서 네 번째 찾아온 곳이지만 이번에는 그 2인실들이 모두 공사 중이라서 근처의 트리하우스에 머물렀지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다음날 아침은 3 관문 정원 산책에 나서
통행문 위, 천장화인 용그림도 여전함을 확인하고
그 앞에서 멀리 산 풍경을 즐기는 중입니다.
울울창창, 소나무 세 그루 앞에는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5언율시와 한글풀이가 있습니다.
그는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과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일족이 흩어지는 참사를 겪었고 중종반정으로 신원된 일도 있습니다.
영욕이 엇갈리는 인물이었지요.
그 옆에는 조령산 등산 안내가 있습니다.
새도 쉬어 넘는다는 조령입니다.
'국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주와 철원의 가을 꽃 구경 (0) | 2024.10.04 |
---|---|
진천과 안성의 9월 (0) | 2024.10.02 |
논산 (0) | 2024.08.14 |
양평 2, 세미원 (0) | 2024.08.02 |
제천 (0) | 2024.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