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의 배롱나무(자미화, 목백일홍)가 곱다기에 찾아온 논산에서는
먼저 탑정호반 주변을 돌면서
반야산 관촉사의
대광명전 옆,
국보 323호인 고려시대의 거대한 석조 미륵보살 입상 앞에 섰습니다.
'고려 광종 19년(968), 반야산 기슭에서 고사리를 뜯던 여인들이
아기 우는 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갑자기 집채만 한 바위가 솟아 나오기에 놀라
관가에 알렸고 이에 조정에서는 금강산의 혜명대사를 초빙,
그가 후세불인 미륵불로 세세연년 이 민족의 기도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36년의 대공사 끝에 18.2m의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만화로,
광명보전 외벽의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었지요.
같은 시기에 조성된 불상 앞의 석탑과 석등에서도 고려 시대의 특징이 보인답니다.
오랜 세월에도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거기서 탑정호 남쪽의 가야곡면으로 내려오면
사육신(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의 한 사람이었던, 매죽헌 성삼문(1418~1456)의
사당과
下馬碑를 지나 올라간 언덕에 그분의 무덤이 있습니다.
성삼문은 20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 학사가 되어 명나라 언어학자인 황천에게 13번이나 다녀오면서 음운을 연구, '정음청'의 한글 창제에 크게 기여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세조 원년(1455) 4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거열형(車烈形)을 받은 후 조각난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나뉘어 매장되었는데 그중 다리 한쪽이 이곳에 묻히면서 처음에는 일지총(一肢塚)이라 불렸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격에 맞게 사당과 묘를 조성을 해 놓은 것이지요.
'사육신'은 가혹한 고문 끝에 참혹하게 죽었지만 숙종 대에 이르러 모두 복권이 됩니다.
탑정호의 주차장이 있는 북문에서
데크길인 600m 출렁다리를 건넜다가 돌아온 오후에는
8월의 무더위 속에서 온통 땀범벅이 되었지요.
이 호수에서 시작하는 7개의 '소풍길' 중, 호수 둘레를 도는 4,7km, 1시간 40분 거리의 하늘호수길이 있었지만 오늘 같은 한여름 날씨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네요.
선선해지면 시골 마을 풍경을 즐기면서 한 바퀴 걷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거기에서 벚나무 가로수길을 달려
이번에는 '계백장군유적지'에 왔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 전적지 옆에
'백제군사박물관'이 같이 있는 곳입니다.
패전국은 철저히 파괴되면서 얼마 남지 않은 백제 유물도 거의 부여나 공주의 박물관에 모여 있으니 여기서는
전장인 황산벌을 되새기는 정도로 볼 것을 거의 없었습니다만
전투장면을 보여주는 짧은 동화動(畫)와
백제군이 사용하였다는, 재현해 놓은 검 몇 개에 당시의 국제 정세를 알려주는 글과 나당연합군의 이동로,
실물대 모형인 계백 장군과 휘하 장수들,
삼국사기에 담긴 기록,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으로 신라의 5만 군사에 대적하였던 장군,
거기에 연합군인 당나라까지 합세하면서 전장에서 산화한 장군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였던 듯, 처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전투에 임하였다는 자료들은 백제의 멸망을 마음 아프게 만들었네요.
박물관 뒤로 사당, 충장사와
장군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동상이, 근처 충곡리에는 장군을 제향 하는 '충곡서원'이 있습니다.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안동의 병산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과 함께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입니다.
여기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성리학 교육시설로 조선 헌종 1년(1660)에 왕의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어 김장생을 주향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까지 모두 네 분을 제향하고 있습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했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랍니다.
입구에 '호연지기(浩然之氣)', '음풍농월(吟風弄月)' 편액이 붙어 있는 2층 문루,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따라가네'라는 뜻의 산앙루 뒤로
정문인 입덕문에 들어가면
'연산현 돈암서원비기' 비를 앞에 둔 강학당, 양성당이 보입니다.
여기는
네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례사의
배롱나무꽃이 화사한 꽃담에도 沙溪와 그 후손들의 예학 사상을 보여주는 글,
地負海涵(지부해함,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 (서일화풍,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처럼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이 멋진 조형으로 새겨 있고
수증기가 응결되어 물방울이 되듯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라는 의미를 담은 유생들의 공부방인 응도당, 서원의 서재인 정의재 외에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신독재전서 등, 상례비요 등을 보관한 장판각이며 거경재, 정회당, 경회당 등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학문의 요람이었네요.
오늘의 숙소,
노성산 아래, 자미화가 가득한 명재 고택입니다.
성리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이 지은 조선 중기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주택으로
지금도 전통한옥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올여름의 장마, 무더위로 지친 꽃들은 그 아름다움이 예년보다 못하다했지만
꽃이 귀한 한여름에 고택과 함께 하는 그 모습은 보기 좋았지요.
사랑채 툇마루에 서면 아랫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고택 뒤의 넓은 언덕에 오르면
오랜 수령의 느티나무 아래 수많은 항아리와 고택의 안뜰이 내려다 보입니다.
전통비법으로 전수되고 있다는 간장, 된장이 여기서 숙성되고 있었네요.
고택에는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일부시설에서는 숙박과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합니다.
전화 041 735 1215
근처에는 논산향교와
공자를 모신 사당, '궐리사'가 있고
가볍게 주변을 산책할 수 있는 '명재고택 사색의 길' 2개 코스가 있습니다.
고택에서 차로 10분 거리,
파평윤 씨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세운 교육장인
종학당에 왔습니다.
여기는 1625년 인평대군의 師父였던 동토 윤순거가 사저에 세운 사설교육기관으로 1665년, 명재 윤증(尹拯)이 초대 사장(師長)으로 부임한 이래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학규를 마련, 280여 년에 걸쳐 42명의 문과 급제자, 31명의 무과 급제자 등 인재를 배출한 곳이랍니다.
가문의 긍지가 느껴졌네요.
정수루 현판을 단
2층의
누각은 유생들이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였고
그 뒤로 종학당에서 초급 교육을 끝낸 아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백록당'이 길게 이어집니다.
중국 주자의 서원 이름이 '백록당서원'이었지요.
정수루 앞 연지에는 연꽃이 피어 있고 작은 호수 너머 마을 풍경은 평화로웠습니다.
여기에도 배롱나무가 많습니다.
선비들이 사랑하던 꽃, 자미화입니다.
동네 어귀에는 충청권에 산재한 향교와 서원, 고택 등 전통적인 유형의 문화자원과 무형의 지식자원 전승을 위한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