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신안, 흑산도

좋은 아침 2023. 6. 11. 07:04

섬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랍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거점이었던 흑산도는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해 해상왕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산성과 관청, 사찰이 들어섰던 

해양기지였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해상교통로이자 어업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해적이나 왜구의 침략 또한 끓이지 않아

조선시대에는  아예 군사들이 상주하여 이 땅을 지켰다네요.  

 

흑산도의 

 

 

여객 터미널 도착,

 

 

많은 사람 틈에 섞여 

 

 

27년 만에 완공된 25.4km 해안 일주도로를  돌아

 

 

'상라산 전망대'에 들렀다가 '하늘도로'를 달려 '흑산도 일주도로 준공기념비'와  '정약전의 사촌서당'과 '유배문화공원',

'면암 최익현 유허비'를 찾아가는 미니버스에 탔습니다.

18000원/1인, 1시간 30분 소요. 

애초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었으나 여행 성수기를 맞으면서 예약 없이는 탈 수가 없었네요.

 

항구에서 출발,

 

 

'배낭기미해수욕장'과 

 

 

'옥섬'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 '상라봉' 주차장에 올랐습니다.

                       여기는 흑산도 해안누리길의 시작이며 흑산일주도로의 첫 관문, 

                       상라산 정상에서는  12 굽이 도로와 인근의 섬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흑산 제1경입니다

 

 

여기저기 흑산도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전남 홍도에서 경남 여수 돌산도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최대 면적의 국립공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신안과 진도, 완도와 고흥, 여수까지 5개 시, 군의 8개 지구, 570개 섬으로 이루어진 해상국립공원 중에서

이 '흑산군도'는 흑산도를 중심으로 홍도와 장도 등 크고 작은 68개의 섬이 흩어져 있다했네요.

 

 

그러면서 훼손되지 않은 숲, 기암절경의 자연경관과 잘 보전된 생태계에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이 땅을

잘 지켜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의  '유네스코 신안 다도해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글과  

 

 

그중에서도 흑산도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왜구를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상라산성(반월성)을 쌓으면서 주민들이 정착,

일제강점기에는 고래잡이의 근거지였으며 삭힌 홍어를 탄생시킨 홍어의 섬이었으며

한때 조기와 고래, 고등어 파시가 번성했고

조선 후기 정약전이 유배생활 중 '자산어보'를 저술한 곳이라는 소개가 있습니다.  

 

 

이 길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걷기 좋은 '해안누리길'로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우리의 해양 문화와 역사, 해양산업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걷기 좋은 길이라는

안내도 나옵니다.  

이 코스는 상라산 정상에서 시작,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와 12 굽이 도로를 지나 새 조각공원과 배낭기미해수욕장,

신들의 정원,  박득순미술관과 흑산면사무소에 흑산여객터미널, 고래공원, 흑산도아가씨 동상까지

흑산도의 빼어난 해안 경관과 넉넉한 인심을 만날 수 있는 약 8km, 3시간 거리라 했네요.

 

 

조선사회의 전통과 부딪혔던 지식인, 정약전(1758~1816)의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그려낸 김훈의 소설, '흑산'과

 

 

홍어를 좋아했던 가출한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 세영이 폭설로 고립된 어느 날,

그의 외딴집에 찾아온 이복누나, 삼례와의 관계 속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쓴 소설,

김주영의 '홍어'를 소개하고 있었으며 

 

 

홍어와 함께 흑산도의 자랑인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그 노래를 부른 가수 이미자의 핸드프린팅까지 볼 수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160m 거리의 

 

 

상라봉 정상에 오르면

 

 

제사터가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노천 제사를 지내며 무역선과 사신단의 무사항해를 빌던 곳으로 철마 등 제사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네요.

봉수대로도 사용된 전망대에서는 아름다운 일출, 일몰을 볼 수 있답니다.

저 건너 흑산항과 바로 아래 12 굽이 길이 보이고 

 

 

뒤돌아서면 멀리 해무에 둘러 싸인 홍도와 바로 앞의 장도가 내려다보입니다. 

 

 

버스는 다시 일주도로에 들어서면서 바위에 한반도 모양의 구멍이 뚫린 '한반도 지도바위'를 지났습니다.

저 뒤로 보이는 '대장도'에는 

 

 

산 정상에 '산지습지'가 있어

 

 

'작은 섬에서 발달한 훼손되지 않은 습지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이 또한 생물권보전지역에 포함되었다지요. 

 

 

이어지는 '하늘도로',  절벽 따라 만든 480m의 길을 지나고

 

 

'일주도로 준공기념비'를 거쳐 '한다령'의 꼬불꼬불한 고개와 평화로운 어촌마을을 

 

 

지나면 

 

 

정약용의 형인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였던 '사리마을'이 나옵니다.

1801년  천주교도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 당시 ‘절도안치’의 종신형 받고 흑산도에 들어왔던 손암은

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촌서당’을 여는 한편 섬 주민 장창대의 도움으로 ‘자산어보’ 집필합니다.

 '黑山魚譜'가 아니라 '玆山漁譜'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손암이 '검을 黑'자의 어두운 기운을 피하고자 '검을 玆'자를 썼기 때문이랍니다.

 

사리마을 위쪽에 조성된 '유배문화공원'에는

사진 오른쪽 위의 노란 초가집인 복원된 '사촌서당'이 있고 그 앞에 먼바다를 바라보는 손암의 동상이 있답니다. 

그 앞의 파란 지붕은 성당이라네요. 

버스기사는 거기까지 가기에는 올라 너무 멀다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사리'는 앞에 방파제 역할을 하는 작은 섬이 있어 자연재해가 없는, 살기 좋은 마을이랍니다. 

 

 

'국립공원 지정 명품마을'이라는 동네, '영산'의 '영산도'를 바라보며 

 

 

인근의 천촌마을 입구, '면암 유적지'를 지납니다.

나만 잠깐 사진 찍고 다시 승차! 

 

 

조선 고종 시대의 문신이었던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일제와 맺은 치욕적인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됩니다. 

여기서 면암은 진리에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고

해배 후에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의병 투쟁을 벌이다가 전북 순창에서 구금, 다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1906년, 그곳에서 72세로  순국하셨습니다. 

이에 그의 제자들은 1924년, 지장암 아래 '적려 유허비'를 세워 그의 애국심과 후학 양성의 공을 기렸습니다.  

 

 

면암은

'흑산도를 거쳐 간 명사들이 많은데 이를 기억할 만한 유적이 하나도 없다'고 한탄하면서

마을 바위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 기자가 봉한 강산이요,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여!)'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고조선 이래 이곳은 조선의 땅, 독립된 땅이라는 의미였지요.

충남 청양군에는 면암의 사당, '모덕사'가 있습니다.

 

 

거기서 '가는개 해변'을 거쳐 다시 흑산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니버스는 상라산 주차장에서 정상에 오르는 잠깐의 시간 외에는 정차를 하지 않아

흑산도를 제대로 돌아볼 수 없어 아쉬웠지요. 

기사에게 부탁을 하기도, 유적에 관심 없는 다른 탑승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번거로웠네요.

홍도에서든, 목포에서든 배가 도착하면서 곧 시작되는 한 타임의 투어(90~100분)가 끝나면

그다음 버스에는 좌석도 여유 있으니 좀 기다리거나 

사전에 예약을 하여 택시 투어를 하는 것이 비용은 조금 더 들더라도 제대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항구에서 두 사람을 수소문하여 우리까지 네 명의 택시 팀을 만들었지만

성수기의 관광객이 몰리는 시간이어서 택시는커녕 혼잡한 버스의 통로좌석이라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두를 일이 아니었네요.

 

 

여객터미널 인근에는 '자산어보 도서관'이 있어 손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지요.

이곳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휘호가 보이는 '자산어보 1'실에는 

 

 

손암의 초상에

 

 

자산어보 필사본의 영인본이 보입니다.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필사본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몇 개의 대학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실학자답게 섬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자산어보'를 시작, 

처음에는 섬사람들의 불확실한 지식들을 정리, 분류한 해양생물도감 정도의 책을 쓸 생각이었으나

당시 해남에 유배 중이던 동생 정약용의 '글로 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저술로 뱡향을 잡았다네요. 

그러면서 흑산도 바다에 사는 다양한 해양 생물의 이름을 조사하고 섬세하게 관찰, 기록한 이 책은

우리나라 5대 고 수산 문헌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외 손암이 쓴 저서 '운곡잡저 권지 1'에는

           흑산도의 민정, 군역, 표류선박 조사와  관련하여  상부 관아에 청원하거나 보고하는 공문서 39편이

           수록되어 있고

 

 

필사본으로 남은, '소나무에 대한 사사로운 의견'이라는 뜻의 '송정사의'는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소나무 확보와  선박 제조기술의 후진성에 대한 고민, 과도한 세금과 지방관리의 수탈로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 이를 조장하고 방치하는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답니다. 

손암은  '세상과 단절된지라 무릇 세속의 교만, 사치, 음란, 도적질 따위의 악습에 물들지 않았다'며

이곳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여 그들을 도와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네요.

 

 

손암의 그림인 '화접도'는 현재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손암이 살던 집의 모형도에

 

 

그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리 마을에 '사촌서당(복성제)'을 열었을 때 

 

 

강진에 유배 중이었던 다산 정약용(1761~1836)이 형에게 보낸 '사촌서당기'도 보입니다. 

'학문이 있고 덕망 있는 큰 학자가 옛 서적을 구하여 어린아이들을 법대로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이들이 글 짓는 일과 세상 다스리는 학문을 익히고 덕을 쌓아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면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육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내 형 손암이 흑산도에서  '사촌서실'을 열면서 5~6인 아이들이 사서와 역사를 배우게 되었으니 

이 아이들에게 일깨움을 준다'는 격려가 담긴 내용이었지요.

 

 

'자산어보도서관'에는 손암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손암은 15년의 오랜 유배 생활의 제약과 절망, 빈곤과 망향의 서러움에 병이 들면서 끝내 해배되지 못한 채

순조 16년(1816년), 59세 나이로 내흑산(지금의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의 우이보(우이도의 해안초소) 아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주검은 제자와 그 부모들의 도움으로 충주목 하담(지금의 충주시 금가면 하유리)의 부친 선영에 안장된 후

경기도 광주시 퇴촌명 앵자산 기슭의 옛 천진암터에 있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 가족 묘역'으로 이장되었지요. 

김훈의 소설, '흑산'은 영화, '자산어보'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세트장이었던 '도초도'를 찾는 사람도 많았답니다. 

흑백이어서 더 강렬했던 그 영화를 보면서 씁쓸하고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시 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후 4시 20분 쾌속선으로 흑산도를 떠나 2시간 거리의 목포로 갑니다. 

요금은 경로 35,400원/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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