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도, 네팔

인도 1

좋은 아침 2009. 12. 21. 22:30

2000년 12월 26일부터 2001년 1월 9일까지, 길잡이가 있는 14박 15일의 여행사의 단체 배낭팀에 합류, 

여행 친구 1명과 인도, 네팔을 돌아다닌 여행일기입니다.

필름 시절의 여행으로 

원판은 없어지고 인화해 놓은 사진도 변색되어 자료로 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아예 여행일기를 올려 놓았습니다.

 

 

2000.12.26 (화) 제1일, 출발

 

오후 김포 공항에서 7시 20분 이륙. 뭄바이 도착. 밤 12시 30분. 8시간 비행.

시차는 3시간 30분 늦어진다.

 

인디아라는 국호는 인더스 강에서 유래.

중동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간에 있어 동서로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갠지스 강까지, 

남북으로는 히말라야에서 케이프 코모린까지의 광대한 땅을 가진 나라로

그 크기는 우리나라의 15배, 남한의 33배 넓이.

 

인구 약 10억 3000천만으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많은 인종,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양한 사회에 빈부 차 극심.

힌두교가 대다수(82.6%)에 불교, 이슬람교, 시크교, 자이나교 등이 있다.

공용어인 힌두어 외에 소수 민족의 언어가 많고 보조 공용어는 영어.

지역에 따라 상당한 기후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몬순 기후. 

남인도는 1년 내내 열대, 히말라야 지방은 대체로 춥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우기.

아샘 지역은 多雨지역으로 세계적인 차 생산지로 유명하다.

 

인도의 가장 큰 특징인 신분제, 카스트는 브라만, 크사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이는 인도의 교육 정도나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많이 완화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단다.

카스트는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의 지배를 제도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학문적인 수준은 상당히 높아서

0에 대한 개념, 마이너스, 방정식, 제곱근을 알았던 수학실력에 5세기 초 이미 

지구는 둥글고 자전한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단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 문명과 함께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문명.

BC 2300년경의 전성기를 시작으로 BC 1800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국의 화려한 시대가 있었고

BC 1000년경에는 인더스 강을 건넌 아리안의 진출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 발전하지만

그 뒤 800여 년에 걸친 무슬림 시대가 있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서방국가의 침입으로 18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불복종의 민족주의 운동이

전 인도를 하나로 묶으면서 1947년 독립.

그러나 넓은 영토와 다양한 종교, 카스트 제도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분리, 독립하게 만들었

현재도 카시미르 지역에서 파키스탄과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뭄바이 공항 앞은 시계가 좋지 않고 공기도 탁하다.

가로등은 흐릿해서 전체적으로 어둡고,

숙소인 Sahil Hotel로 가는 길가에는 가족 단위의 노숙자들이 많이 보였다.

한밤중인데도 날씨는 후덥지근.

 

 

2000년 12월 27일 (수) 제2일, 뭄바이  아우랑가바드, 야간 열차 이동

 

아침 식사 후 리셉션에서 환전.

1달러에 약 46루피, 1루피는 우리 돈으로 27원 정도이다.

인도에서 찢어진 돈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하여 한 장 한 장 살펴보아야 했다.

팁 등 사소하게 쓸 일이 많으니 잔돈을 많이 준비하라는 길잡이의 조언.

또 오른손은 신성하고 왼손은 불결하게 여겨 무엇을 가리키거나 만질 때는 꼭 오른손을 써야 한단다.

우리의 전용 버스에 현지 가이드와 조수가 같이 타고 다닌다.

버스 내부에 그들이 모시는 신의 그림이 붙어 있다.

운전석이 차의 오른쪽에 있고 출입문은 왼쪽이어서 우리와 다르다.

 

오늘은 뭄바이 시내 관광.

영국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알던 봄베이를 원래의 이름,

뭄바이로 다시 바꿔 부른다했다.

맨 처음 간 곳은 도비가트, 대형 집단 빨래터.

철로변, 일반 도로보다 낮은 지역에 시멘트로 구획된 수많은 빨래터에서

세탁부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수타 동작으로 빨래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그들은 카스트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로 월수입은 우리 돈으로 21000원 정도.

간디는 그들을 가엾이 여겨 ‘신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하리잔으로 불렀단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로 미국 실리콘 밸리의 두뇌 중 반 정도가 인도인이라지만 현재 GNP는 400불.

거리는 남루하고 거지가 많다.

그들이 타는 시내버스는 상상 이상으로 낡았다.

그래도 이 나라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 

우리의 프라이드보다 작은, 검은 색과 노란 색이 섞인 국산 택시가 1,2차선에 주차해 있다.

 

간디 박물관(마니 바반), 자이나교 사원, 프린스 웨일즈 박물관, 인디아 게이트를 보고 과일 시장 구경.

타지마할 호텔이나 빅토리아 역처럼 아름다운 건물도 많다. 

그 타지마할 호텔은 바다가 보이는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면서 인도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유명.

식민지배의 영국에 맞서 순수 인도인의 자본으로 100년 전에 건설했는데 

하루 숙박비가 인도 농민 한 사람의 연평균 수입과 같다고 했다.

간디 박물관에는 우리말로 된 설명서가 있어서 반가웠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자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인도를 이끌었던 간디는

독립 이후 힌두와 이슬람의 종교 갈등 와중에 1948년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 

간디의 일생에서 중요 사건들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고 수 많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인도인들이 그 안에 있는 간디의 묘소에 찾아와 참배했다.

 

                                     

프린스 웨일즈 박물관은 세밀화가 유명한 곳으로 

 

                                                         

                                                    입장권이 예뻐서 책갈피로 써도 좋을 듯.

 

 

 

인도문(인디아 게이트)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치하에서 영국군에 차출되었다가 전사한 인도의 젊은이, 9만 여 명의 이름이 새겨 있다. 

뭄바이는 자이나교와 조장 풍습에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조로아스터교) 신도가 제일 많은 곳.

그 두 종교의 신도는 주로 인도의 상류층이라고 했다.

과일 시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석류가 많다는 것.

원래 이란이 원산지라는데 우리나라의 것과는 달리 크고 달다.

 

거지들이 우리를 졸졸 따라 다닌다.

인형 같은 작고 예쁜 아기를 안은 인도 아리안의 엄마 거지가 먹을 것을 구걸했다.

사리와 펀잡의 물결 속에서 처음으로 미니스커트 여자를 본 것도 이채로웠다.

이 나라에서 가장 인도답지 않은 도시라고 한다.

 

 

야간열차 탑승, 아우랑가바드 행.

안쪽은 3층, 통로 쪽은 2층의 1등 침대칸이다.

깨끗한 시트 외에는 커튼도 없이 열차 한 칸 전체가 오픈되어 있다.

인도의 열차에서는 도둑을 조심하라던데 의자 밑에 도난 방지용 쇠사슬이 있는 것을 보니 불안하다.

 

 

2000년 12월 28일 (목) 제3일, 아우랑가바드  보팔(산치)

 

아침 6시 30분, 작은 시골 마을 부사발 역 도착.

여기도 더운 여름 날씨이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그늘에 가면 서늘하다.

오늘 일정은 불교 미술의 보고인 29개의 아잔타 석굴군과 34개의 엘로라 석굴군 관광.

 

가도 가도 끝없는 황무지에 가끔 위가 평평한 긴 구릉이 보인다.

길에는 멧돼지에 검고 흰 소 떼, 염소와 개들이 돌아다니고 까마귀며 비둘기도 많다.

소는 신성한 동물, 이들이 섬기는 힌두의 우두머리인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라서 

농사일에 쓰기는 해도 잡아먹지는 않는단다.

늙어 쓸모없게 된 소가 방치되어 거리에 돌아다닌다.

거리의 가로수는 이런 소와 염소들이 서로 뜯어 먹기 때문에 울타리를 쳐서 보호했다.

힌두인들은 쇠고기를,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인도는 향의 나라.

사원과 여자들에게서 나는 짙은 향냄새에 음식에서 나는 각종 향신료의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

운전수들의 운전 솜씨도 아주 거칠다.

끊임없는 경적 소리, 무서움을 모르는 추월로 차에 탄 사람을 마음 졸이게 했다.

반대편에 차가 오는 것을 보고도 중앙선을 넘는다.

이들의 경적 소리는 운전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horn please'

드물지 않게 길가에 나뒹구는 낡은 화물차들을 볼 수 있다.

돌아다니는 화물차마다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인도의 공기가 나쁜 것은 싼 디젤 연료를 쓰는 낡은 차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인도의 여자들은 치장하기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금으로 만든 귀걸이에 코걸이며 목걸이 등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모두 화려하게 꾸몄다. 

세계 최대의 금 소비국가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들은 유부녀일 경우 붉은 색, 남편을 잃은 여자는 흰 색의 점, 빈디를 미간에 찍는다.

전체 인구 중 중북부에는 인도 아리안이 70%, 남부에는 토착민인 드라비다가 25%,

몽골계는 동북부에 약 3%가 살고 있단다.

 

아잔타 석굴은 불교 사원으로 개방되는 26번 이후로는 계속 발굴 공사 중.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 문화유산이다.

AD 2C ∼ 7C까지에 만들어졌지만 1000여 년 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세기 영국군 장교가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발견했다.

U자형으로 흐르는 와고라 강가에 있다.

벽화는 흙벽 위에 쌀겨나 돌가루 반죽, 점토들을 두껍게 칠한 후 다람쥐꼬리 붓으로 황토며

색이 있는 돌가루를 이용,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혔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먼지가 코팅 역할을 하여 그림이 잘 보존되었는데 

요즈음에는 거친 청소작업으로 망가지고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훼손되거나 색이 많이 바래졌단다.

벽화는 문맹자 설법을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인도 고대의 화려한 벽화 미술의 소중한 이 자료 중에서

석가모니의 출가를 그린 벽화의 1호, 마야 부인이 등장하는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 담긴 2호와

16, 17번 굴이 특히 유명.

26번 굴의 왼쪽 복도에는 7미터 길이의, 인도에서 가장 큰 열반 부처상이 있다.

이 석굴은 이후 중국의 돈황석굴 조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8세기에 들어와 힌두교의 등장으로 불교는 점차 쇠퇴되면서

밀림 속에 방치되어 세간에서 잊혀졌다. 

석굴 안 쪽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부처상 옆에는 전등불로 부처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여행자들의 팁이 그의 생계 수단이란다.

 

엘로라는 불교와 힌두교와 자이나교 세 종교가 서로 공존하는 곳이다.

처음 조성된 1 ∼ 12굴은 불교 석굴로 5 ∼ 7C 경, 13 ∼ 29굴은 힌두 석굴로 7 ∼ 9C 경에,

가장 늦은 것은 자이나교의 석굴로 8 ∼ 10C 경에 만들어졌다.

엘로라의 16번, 카일라스 석굴은 100년의 긴 세월 동안 조성된 것으로 이 나라를 알리는 홍보 사진에

많이 등장하는 사원.

거대한 한 개의 바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 가면서

신과 타라 여신상(관세음보살), 天女, 코끼리와 사자를 조각했다.

탑의 옆면에는 풍만한 육체들의 성행위를 담은 조각,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미투나상도 있다.

시바신의 상징, 링가(거대한 성기)를 모셔 둔 곳에는 인도인 관광객들이 많다.

석가모니불과 자이나교의 마하비나상은 그 모습이 비슷한데 이것은 발생시기가 거의 같기 때문이란다.

철저한 무소유를 신봉한다는 자이나교의 부처님은 몸에 걸친 것이 없었다.

 

다시 부사발 역으로 돌아가 저녁 7시발 보팔 행 열차 탑승.

 

열차를 기다리면서 차를 파는 장수, 짜이왈라에게 사 마신 뜨거운 짜이

-홍차에 우유를 섞고 생강과 설탕을 넣은 차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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