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4일 (목요일) 제10일, 알라하바드 → 바라나시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드문 지 일 없이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모두 남자.
델리를 빼고는 수질이 안 좋다.
역시 안개 때문에 맑은 야무나 강과 탁한 갠지스 강이 만나는 상감 구경을 못했다.
올해 태양력으로 1월 9일부터 2월 26일까지인 꿈부멜라 기간, 이 두물머리 강변에는 수많은 텐트가 들어섰다.
그러면서 붙은 임시 도시 이름이 꿈부나가르.
사람들이 타고 온 버스가 여기 저기 서 있고
이 강의 물로 세탁한 4-5미터 길이의 젖은 사리를 잡고 말리는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의 경전인 베다를 읊는 소리가 넓은 들판에 퍼진다.
각양각색의 사두, 구루들의 모습도 이채로웠다.
힌두인들은 살아서 갠지스에 목욕하며 그 물을 마셔 죄를 씻고
죽어서는 이 강가에서 화장되어 그 재가 강물에 뿌려져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바라나시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석가모니 부처의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녹야원)에는
불교 전성기,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가 부러진 채 전시되어 있고,
주변에는 여러 나라 불교신자들의 후원으로 지은 사찰이 많았다.
부처의 정각 보리수 손자라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철책 안에 서 있다.
경내에 부처와 그의 설법을 듣는 제자들의 모습을 밀랍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황색 가사를 걸친 티벳 불교 스님(라마승)들이 많이 보인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가트(강가의 계단)로 갠지스의 일몰을 보러 갔다가 안개만 자욱하기에 실망,
그냥 되돌아 왔다.
릭샤는 왕복 30분 쯤에 50루피(약 1350원).
그 복잡한 거리의 장애물을 아슬아슬 피하면서 말라빠진 두 다리로 페달을 밟는 모습이 신기하고 안쓰러워
릭샤왈랴에게 요금 외에 팁 1달러를 주었더니
이 아저씨, 더 달라고 떼를 썼다.
마우 사트나 예술학교에 가서 학생들의 민속 무용 구경.
화려한 의상에 짙은 화장, 민속의상을 입은 여학생들은 컵과 쟁반에 올라서거나
머리에 항아리를 올려놓고 춤을 추었다.
손동작보다는 방울을 매단 발의 동작이 많아서 수십 개 방울소리가 경쾌했다.
무대는 부실했지만 학생들의 수준 급 민속무용은 감동적.
우리 직전에 미국인들의 관람이 있었다니 이 일이 이곳의 중요한 수입원이리라는 생각.
여기저기 궁핍한 냄새가 나지만 그들에게는 당당한 자존심을 느껴진다.
2001년 1월 5일 (금요일) 제11일, 바라나시 → 룸비니
안개가 자욱한 아침.
새벽 6시, 마나카르니카 가트에서 배를 타고 멀리 나가 5루피에 산 푸자를 띄워 보냈다.
마하 강가, 위대한 갠지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마찰로 철창 안에 놓인, 순금 탑신의 황금사원이 있는 시장 골목.
햇빛이 들지 않는 좁고 어두운 길에서는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배설물을 쏟았다.
집들이 낡고 우충충하다.
강변의 한 쪽 구석에 있는 화장터.
가까이 가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못하게 하기에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만 보았다.
무슬림은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힌두인은 화장하는 두 종교의 내세관 차이가 극명하다.
국립 힌두대학을 돌면서 그 안에 있는 사원 비슈파낫 구경.
이곳 역시 시바신의 링가는 특별한 기도의 대상이다.
이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설치되어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
늦은 아침 후 네팔로 이동.
중간 중간 들르는 마을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서는 석유 등잔을 켜고
매운 연기가 나는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서 밥을 지었다.
집안을 들여다보니 황토가 그대로 드러난 헛간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자고 있다.
네팔과 인도의 국경, 소나울리에서 비자를 받기 위해 30분간 지체.
룸비니를 보거나 포카라로 가는 여행자들은 이쪽을 거쳐야 한다.
국경이라야 커다란 문이 하나 서 있는 곳으로 현지인들은 자유로이 오고 갔다.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조그만 가게며 카바이트 불을 켠 리어카 장수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서류를 쓰고 사진 한 장 붙인 다음 도착 비자비 30달러를 냈다.
1년 안에 다시 방문할 경우에는 50달러.
네팔은 인도 북부와 중국에 걸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고립된 나라,
세계 14개 최고봉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 8개봉을 가진 산악국가로 한반도의 절반을 조금 넘는 면적에
인구는 2000만 명 정도.
세계 최빈국의 하나, 국민 49%가 빈곤층이며 GNP는 213불로 인도보다 낮다.
자체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지리적 여건도 열악.
15세기 야크사말라 왕조가 그의 세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하면서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로 나뉘기도 했다.
한 때 영국의 식민지.
히말라야 설원의 물이 네팔을 거쳐 인도로 흘러가는 갠지스 강의 상류에 해당하니
인도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사실상 정치와 경제는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인도는 일이 생길 때마다 국경을 봉쇄하여 이들의 목을 죄는 듯하다
우리말이 능숙한 몽골인 가이드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36세 쉘파족인 그의 이름은 덴디.
원정 왔던 우리나라 산악인들과 어울리면서 우리말을 배웠단다.
이곳은 달러가 통한다고 해서 조금만 환전했다.
1달러에 71루피. 인도 루피와는 1 : 1.6. 네팔의 1루피는 우리 돈으로 약 16원.
2001년 1월 6일 (토요일) 제12일, 룸비니 → 포카라
아침 일찍, 석가 탄생지 룸비니 방문.
관리가 허술하다.
한쪽에서 석가족들이 모여 독경을 하고 있었다.
마야 데비 사원(마야 부인의 사원), 정각 보리수의 손자 나무, 구룡연, 탄생지 등 구경.
불경을 베껴 쓴 색색의 천 조각, 타르초들이 보리수를 덮다시피 걸려 있다.
해발 1500m의 포카라 행.
번화가인 버스 터미널에는 몽골족들이 많이 보여서 꼭 우리나라 시골 장터 같았다.
이동하는 동안 푸른 나무들이 보이면서 흙먼지 평원의 인도보다 평화스럽다.
그러나 높은 곳까지 밭을 만들어 경작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삶 또한 팍팍할 것 같았다.
들판에서 땔감을 모으는 아이와 여자들은 특이하게도 이마에 끈을 연결하여 짐을 짊어지고 다닌다.
포카라로 올라가는 산길은 지난 번 우기 때 쓸려 나가면서 보수공사를 중.
여기 여자들도 코걸이에 귀걸이, 목걸이에 팔찌며 허리띠에 발찌, 발가락 장식까지 겹겹이 둘렀다.
네팔의 이름은 ‘네라는 고승이 만든 양털처럼 좋은 나라’라는 뜻.
‘네와르족의 술, 럭시를 마시는 술잔 모양의 나라’의 뜻도 있단다.
힌두의 시바신과 관련, 소에 대한 외경심이 깊어 자동차로 소를 칠 경우 감옥에 가야한다.
세계 유일의 힌두 국가이면서 사회주의를 따르는 듯,
4년 전에는 토지를 공평하게 나눠 주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먹을 것은 해결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인도처럼 손 내밀며 따라 다니는 거지가 없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패는 심각할 정도라 했다.
석가모니 부처의 출생지, ‘룸비니’가 있으니 여러 나라의 불자들이 원조를 해 주고 있지만
힌두 국가인 이 나라에서 힌두의 아홉 번째 신에 불과한 부처의 일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고.
인도는 공식적으로 술을 살 수 없지만 이 나라에서는 통제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낮에도 술에 취해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인도 아리안이 65%, 몽골인이 35%이며 종교는 힌두교 80%, 티벳 불교(라마교) 20%.
네팔 일정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우기는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그러니 관광은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가 적당하다.
포카라에서는 티벳 난민촌을 돌아보고 지하로 떨어지는 데이비스 폭포에 다녀왔다.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페와 호수의 중앙에는 작은 힌두사원이 있다.
석양에 비친 설산을 바라보며 환상적인 40분의 보트 드라이브.
카메라에 한 장에 담을 수 없어서 엽서를 샀다.
선착장에서 한 사내아이가 ‘사랑기’라는 악기를 연주하며 ‘레쌈 삐리리’를 불렀다.
네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노래인데 멜로디가 쉬워서 금방 따라 부를 수 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테잎을 2달러에 샀다.
티벳 식당에서 먹은 저녁 식사.
우리의 막걸리 같은 똥바(통에 물을 붓고 즉석에서 발효시켜 빨대로 마시는 이들의 전통주)에 적당히 취해서
꼬마의 사랑기 연주와 노래를 듣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일이 없었다.
뗏목 타고 들어가는 호수 속의 숙소, 'Fish Tail Lodge'.
네팔인들의 聖山, 앞에 보이는 설산 봉우리의 이름 그대로이다.
내부 장식이 아주 멋진 이 호텔의 정원에는 키 큰 포인세티아가 무성하고
호수의 녹색 물빛은 맑아서 바닥의 풀들이 다 보인다.
2001년 1월 7일 (일요일) 제13일, 포카라 → 카트만두
호수를 건너 차로 20분 이동, 조금 걸어 올라간 곳에 일출의 명소, '사랑코트'가 있다.
동쪽 지평선에는 구름이 끼었지만 반대편에서는 햇살 받아 빛나는 안나푸르나가 있었다.
카트만두에서는 '파슈파트낫(낫은 사원이라는 뜻)'을 보면서 불교 사원인' 보드낫',
아름다운 창문으로 유명한 구 왕궁, 공예품시장이 있는 '달발스퀘어'와 그 한 쪽에 있는 '쿠마리사원',
‘한 그루의 나무로 지어진 사원’에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로 범벅 된 '깔리 신의 신전'을 돌았다.
파슈파트낫은 힌두인만 출입 가능.
그 앞에서 화장하는 풍습을 볼 수 있다.
역한 냄새, 피어오르는 흰 연기 속, 차례를 기다리는 천에 싼 시체들.
삭발한 상주는 불에 타고 있는 시체 주변을 계속 돌았다.
죽은 자는 살아서의 신분처럼 돌다리를 기점으로 화장 장소가 달라진다.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갠지스에서 화장되는 것.
그러나 장작 값이 너무 비싸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화장을 할 수 없단다.
그들이 신성시하는 앞의 개천은 이미 강의 기능을 잃고 시궁창 냄새를 풍기는데도
네팔인들은 그 물을 병에 담아 갔다.
타다 남은 장작이 개천 여기저기에 쓰레기로 쌓여 있다.
모델료 1달러를 외치는 사두들의 기이한 모습.
절 앞에는 색깔도 선명한 갖가지 물감을 팔거나 티벳에서 온 난민들의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많다.
보드낫에서는 사원에 설치된 마니차를 돌리며 ‘움메니반메홈’을 낭송하는 티벳인들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같이 돌았다.
네팔에서 가장 큰 수투파(탑)가 있는 이 사원은 티벳인들의 성지.
판첸라마는 아직 남아 있지만 달라이라마는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세웠고 그러면서 이제 티벳은 점점 제 모습을 잃어 간다고 한다.
소수 민족이 설 자리를 빼앗기고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받으니
거대한 한족의 나라, 중국-가진 자의 끝없는 횡포가 안쓰럽다.
우리가 시주를 하자 가이드의 요청으로 3층에서 잠깐 얼굴을 내밀던 어린 꾸마리.
7,8세 쯤 엄격한 조건에 의하여 선발된 쿠마리는 초경 전까지는 살아 있는 여신으로 추앙을 받으며
식구들과 함께 사원 3층에 산다.
석가족 만이 쿠마리의 자격이 있다.
'카트만두'는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든 사원이 있는 도시’라는 뜻.
2001년 1월 8일(월), 1월9일(화) 제14, 15일 카트만두 → 방콕 → 인천
인도 여행에서 겨울일 경우에는 안개 끼는 날이 많으니 중요 일정은 오후에 잡는 것이 좋다.
낮이 짧은 것도 감안할 것.
아그라의 타지마할도, 알라하바드의 상감도, 갠지스의 일몰도 안개 때문에 놓쳤다.
뭄바이와 보팔 외에는 구름 낀 날이 많아 쌀쌀한데다가
일교차가 심해서 긴팔 셔츠, 따뜻한 쉐터와 잠바가 필요하다.
사원에 입장할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더러워진 양말을 갈아 신을 수 있게 새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가 인도 여행의 적기라는데 1월에는 안개가 많아서 視界가 좋지 않았다.
도시 간 이동 거리가 길고 도로 사정이 나빠서 소요 시간을 예측할 수 없으니
항상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화장실도 미리 다녀와야 한다.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더러 현지 식당에서 냄새나는 한국 음식을 풀어 놓고 먹는 모습은 그리 좋지 않으니
신경 써야 할 부분.
늦은 시간에 첵크 인하여 저녁을 먹고, 새벽에 나오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자유로운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인도에서는 일정을 느긋하게 잡을 것.
미네랄워터는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