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14일 화요일 제5일, 투루판
아침 산책길,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사람이 꽤 있고 더위를 피해 집밖 노상에서 자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스카프를 머리에 쓴 위구르 여자, 사각으로 접은 모자(휴베테이카)를 쓴 남자도 보인다.
지난 밤, 광장을 가득 채웠던 야시장은 깨끗하게 철수했다.
오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교하 고성'을 돌아다녔다.
한때 인도의 불교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곳이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거대한 군함 모습으로 서 있던 왕국은
주변의 흙으로 성을 만들고 민가를 짓고 절과 관청을 지었지만
이 오아시스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폐허가 되어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오후에는 '아스타나 고분', '고창 고성', '화염산', '베제크릭 천불동' 관광.
황량한 벌판의 아스타나('영원한 휴식'의 뜻)에는 장군묘, 상인묘 들이 모여 있다.
덥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사상 유례 없이 장기가 보존된 미이라를 발견한 일도 있단다.
한 무덤 안의 벽화, 여섯 쪽 병풍 그림은 인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란다.
500여 개의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부장품들은 당나라와 그 이전의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이곳이 오래된 도시임을 증명하고 있다.
고창고성에서는 바람이 너무 거칠어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1km 정도,
안쪽 대불사까지 당나귀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20위안.
마스크를 해야 할 정도인 강한 바람이 불 때는 관광이 금지된다.
메마른 모래 바람은 이 왕국을 철저히 파괴, 흙벽돌로 쌓아 올렸던 민가, 절, 궁궐도 모두 흙으로 되돌아갔다.
훼손 상태가 너무 심해서 설명 없이는 짐작도 할 수 없으니
당나라 현장법사와 국문태왕의 이야기도 한 줌 흙이 되었다.
화염산은 지표면 온도가 80도로 모래 속에서 빵을 구울 수 있을 정도라 했다.
이곳은 200km에 이르는 긴 산.
소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으로 가던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을 끈 곳이다.
적, 황, 회색 등 몇 가지 색으로 산을 만들어 불에 구워 놓은 것 같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라든가 저녁 석양을 받아 골짜기에 반사되는 햇빛이
마치 불꽃처럼 보인다해서 붙은 이름, 화염산.
그래도 이곳은 10개의 계곡 사이로 천산의 물이 흐르면서 오아시스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배제크릭 석굴사원은 화염산의 한쪽, '무르토크 강변'의 절벽 위에 있다.
6세기 고창왕국 시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만들어지면서 10세기 위구르 지배시기에는
왕실의 종교적 성지로 번영했다.
주로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벽화가 많은데 재 벽화가 남아 있는 40여 기 중에서
7기 동굴만 개방 중.
33번 굴의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벽화 중에서 조우관을 쓴 인물은 신라의 왕자로 추정하고 있단다.
벽화 중에는 무릎을 꿇은 두 명의 남자가 공양물을 들고 있는 그림과
꽃을 들고 있는 우아한 자태의 손을 묘사한 그림,
주렴 그림의 일부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돔 지붕과 회랑 속 석굴 안, 유적과 유물은 무슬림과 서양의 강대국, 중국의 홍위병에게
수 차례에 걸쳐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
그중 독일의 르코크 일행이 가져간 수많은 유물은 2차대전 와중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눈은 우상을 거부하는 무슬림들에게 모두 훼손되었다.
작은 박물관 안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해 놓은 배제크릭(위구르어로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의 뜻)의 영상을 볼 수 있다.
새벽 1시 30분에 출발하는 돈황 행 열차는 밤새 10시간을 달렸다.
드넓은 모래사막에는 바람 소리가 아주 거칠었다.
이 바람이 달리던 열차를 쓰러뜨리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더니 문 틈으로 들어온 모래가 입안에 씹힌다.
2001년 8월 15일 수요일 제6일, 투루판 → 돈황
사막 속, 일출의 장관을 보다.
'돈황'은 ‘크게 번성하다’의 뜻으로 사막과 고비의 경계인 타클라마칸 동쪽 끝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
중국과 서역을 잇는 교역의 요지였던 이곳은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의 비단길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던 대상들의 쉼터였다.
4시 넘어 명사산 동쪽에 있는 돈황 석굴 중 가장 유명한 '막고굴' 도착.
우리말을 하는 한족 가이드가 같은 코스의 우리나라 관광객 전체를 안내한다.
사진 촬영 금지!
5시의 폐관시간에 쫓기면서 100여 명의 인원이 몰려다닌 탓에 대충대충 넘어갔다.
게다가 조명이 따로 없어 가이드의 손전등 불빛 따라 부분부분을 살피면서
전체 윤곽은 잡히지 않았고.
현재 복구된 굴은 492개이지만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개방 숫자를 줄여가는 중이란다.
볼 만한, 보려고 했던 곳은 거의 옵션, 굴마다 별도로 60위안을 받는다.
벽화는 320굴의 비천상이 가장 유명하고
45굴의 칠존상 부조에서는 당대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우관을 쓴 신라인이 그려있다는 237굴, 220굴, 335굴은 구경도 못했다.
16굴 안의 감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보관했던 장경동 17굴에는
한 스님의 작은 소상만 남아 있다.
여기서 도난당한 고문서들은 지금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되어 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본따서 만들어진 돈황 석굴의 벽화는 색채가 더 화려하지만 규모는 작았다.
어두운 동굴에 오랫동안 미공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색채를 보존할 수가 있었단다.
모두 유네스코문화유산.
4세기 동진 시대에 시작되어 거의 1000년 동안 1.6km 거리에 만들어진 이 막고굴을 포함한 돈황석굴은
중국 3대 석굴(용문 석굴, 운강 석굴, 돈황 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그 내용도 풍부하지만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도굴로 엄청난 자료가 유출되면서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굴이 비어 있다.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파키스탄의 라호르를 거쳐 들어온 불교문화는
이곳에 정착하면서 수많은 불교문화유적을 남겼다.
2001년 8월 16일 목요일 제7일, 돈황
둔황의 호텔에서 5분 거리의 명사산과 월아천 행.
1시간 20분 동안 8달러 옵션으로 낙타를 타고 다녔다.
동서 길이 약 40km 폭 20km의 모래언덕인 명사산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흘러내리는 모래 소리가
모래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여 붙은 이름.
바람이 양 쪽에서 불기 때문에 명사산 모래의 양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10위안에 나무 판넬을 빌려 모래 언덕에서 미끄럼을 탔다.
내려 올 때는 신나지만 다시 올라가기는 힘들어서 두 번으로 끝.
다시 낙타를 타고 호수로 내려가니 모래 사막 속에 월아천과
그 옆, 도교의 성지인 4층 누각, 월천각은 거친 바람으로 지형이 자주 바뀐다는 사막에서도 끄떡없이 서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마르지 않는 반달 모양의 작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나올 때는
거친 모래 바람 때문에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 이 월아천은 둔황 남쪽, 설산의 눈이 녹아 지하로 흐르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끝없는 사막 속, 외줄기 포장도로 63km 거리를 3시간 달려 양관 도착.
여기에서 옥문관과 함께 서역을 잇는 관문,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된다.
그 입구에 세워졌던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알리는 봉수대는 겨우 흔적만 남아 있고
그 옆으로 중국 정부가 새로 만들어 놓은 정자와 비각이 보인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땅’이라는 뜻의 이 사막은 한반도의 1.5배에 이르는 죽음의 땅이었다.
막막한 지평선과 거친 모래 바람, 따가운 햇살 속에 군데군데 보이는 무덤 봉분과 비석이 황량함을 더했다.
중국 정부는 6∼7월의 모래 폭풍으로 도로에 계속 쌓이는 모래를 쓸어 내기 위하여 10km마다 관리인을 두었다.
포도 농원인 전통 농가에서 간단한 식사.
한 노인에게 4원을 보이며 포도를 달라는 시늉을 하니 인심도 후하게 아주 많이 주었다.
우루무치의 포도보다 작지만 더 달다.
일본인이 만든 영화, ‘돈황’의 현장인 돈황고성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무너지고 있었다.
이른 저녁 식사 후 허허 벌판에 서 있는 돈황 공항에 6시 도착, 오랜 지연 끝에 겨우 이륙하니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은 듯하다.
2001년 8월 17일 금요일 제8일, 돈황 → 서안 → 서울
7시에 공항으로 출발.
중국 서북 항공은 9시 30분 이륙, 인천 12시 도착.
여행 구성원들 간의 날선 인간관계, 가이드의 노골적인 팁 요구와 쇼핑 센터에서 낭비되는 시간 등
우리나라 패키지 여행의 단점이 골고루 노출된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은 답답하다.
'3. 중국 실크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실크로드 1 (0) | 2010.01.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