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떠나려던 몽블랑 돌기, '뚜르 드 몽블랑'도 무산되고
고립된 긴 시간에 지치면서 만든 아침 놀이는
여행지에서 사 온 여러 개의 컵 중에서 매일 한 개를 골라
커피를 마시며 지난 여행을 반추하는 것.
프랑스 파리의 명소가 그려있는 잔도 좋고
카페 '되 마고'에 들렀다가 사 온, 두 개의 중국 인형이 담긴 잔도 좋습니다.
고흐와
모네를 생각하는 시간도 흐뭇했습니다.
보랏빛 라벤더 그림의 잔,
빨간색 에스프레소 잔도 모두 남프랑스 특유의 분위기와 강렬한 색깔을 담고 있었지요.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담긴 컵에
코르티나 담페초의 '트레치메'를 돌면서 즐거워했던,
이탈리아 알프스 풍경이 담긴 잔을 보면서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 자주 찾아갔던 산 마르코 광장, 그곳에도 '코로나 19'가 돌면서 여행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지요.
주말의 교통편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서 알베르 벨로의 원추형 석조 건물, '트룰로 호텔' 숙박 계획이
틀어진 것은 여전히 서운하고!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의 시커먼 용암 덩어리를 갈아서 성형한 컵은 그 그림부터 충격이었습니다.
영화 '대부 1'의 주인공이었던 '말론 브란도'의 얼굴이 등장하는 권총 모양 컵을 보았을 때는
와! 얼마나 신기하던지요.
친케테레, 해안가의 5개 마을을 이어 걸었던 기분 좋은 트레킹도
아일랜드 더블린의 '기네스 맥주' 공장을 찾아 한 잔 하던 일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시인 예이츠의 얼굴이 담긴 잔 뒷면, 그의 시 한 구절과
남부 도시, 킬케니의 재미있는 시가지 그림과 오래된 컵은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중의 하나.
캐나다의 상징인 무스, 비버와 카누, 단풍이 나오는 컵을 들여다보면서
'안녕, 무스', '안녕, 비버' 인사말도 건네봅니다.
'드림 캐쳐'를 문 앞에 매달아 놓으면 나쁜 꿈이 걸러진다는 전설을 원주민들은 실제로 믿었을까요?
흰 눈이 펑펑 내렸던 록키의 도시, 밴프와
꽃의 도시, 빅토리아의 '부차드 가든'은 그 풍경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캐나다 연방에서 독립하기를 원하는 몬트리올과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오래전, 연방에 합병될 당시 그들의 조상이 영국계에게 겪었던 수모를 잊지 않기 위하여
'Je me Souviens, 즈 므 스비앙 - 우리는 기억한다'는 각오를
자동차 번호판이나 기념품 등 곳곳에 써 놓았지요.
거기에 이 땅의 원주민인 붉은 얼굴이 등장하는 컵과
호주의 원주민, 애보리진 특유의 문양이 담긴 컵,
1989년 8월, 소비에트 연방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던 세 나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국민 200만 명이 각각의 수도인 탈린에서 리가, 빌뉴스까지
600km 거리를 서로 손을 잡은 '인간 띠 잇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드디어 독립을 이룬, 용감한 국민들이 사는 발트 연안의 나라,
그중에서도 에스토니아 탈린의 망루가 그려 있는 컵은 볼 때마다 감동, 감동입니다.
겹겹의 인형, 재미있는 마트료슈카 옆의 모스크바, 바실리카 성당에 클로즈업되는 사람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4인실의 내 쿠페에 선점,
팬티만 걸친 채 밤낮으로 술, 담배에 카드놀이로 시끄러웠던 안하무인의 러시아 젊은이 세 명.
일반 좌석에 있던 그들의 또 다른 일행에게 내 몫의 침대를 점령당하면서
결국 다른 쿠페의 짐칸에서 자야 했던 일도 이제는 용서해 주어야겠지요?
이스라엘의 '오병이어-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담긴 찻잔에서는 신앙의 힘을 생각하고
신화의 나라, 그리스의 메테오라에서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을 찾아 걸었던
꽃 핀 봄날도 잊지 못합니다.
이슬람의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 정교회에 들렀다가 산 이 컵에서는
그 나라의 순결한 산과 들판을 걸었던 나날을,
브라질의 국조, '투카노'가 나오는 컵에서는
이과수 폭포의 '악마의 목구멍'에서 쏟아지던 거친 물 폭탄을 기억합니다.
그 마을에서 만난 피리 노점상, 원주민 남자의 수준급 피리 소리에 반해서 구입했던 피리는
지금 내 진열장 안에 갇혀 있습니다.
터키에서는 이슬람 특유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그려진 예쁜 컵이 많아서
선택하기 어려웠던 일도 여러 번이었네요.
샤프란 볼루의 민박, 하티제 아주머니 댁의 편안했던 전통 가옥에서 다시 며칠 지내고 싶은 생각도 가끔!
나르시소스의 신화가 전해지는 마케도니아의 아름다운 오흐리드 호수와
짧은 일정으로 돌았던 쿠바는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입니다.
헤밍웨이 얼굴이 보이는 이 컵은 내가 제일 아끼는 커피잔이랍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구시가에서
타탄 킬트 스커트의 악사가 연주하던 백파이프 특유의 음색도 그립고.
런던에서 후회되는 것 중의 하나는 빨간색의 2층 버스를 놓친 일.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무덤이 있는 영국,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본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산
이 컵에는 그의 중요 작품 속 인물들, 햄릿과 클레오파트라, 리어왕 들이 희화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볼 때마다 즐겁습니다.
아쉽게도 마사이족이 사는 케냐에서는 이런 사연들이 담긴 커피 잔을 살 수가 없었지요.
아래 보이는 머그는 우리나라의 한 커피숍에서 그 나라를 추억하면서 산 거랍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낙타 손잡이 컵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종 상부를 장식한, 전통옷을 입은 남녀의 생뚱맞은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비자 발급이 까다로웠던 아제르바이잔의 컵에는 그 나라의 국기가,
'바키(바쿠)'라는 수도 이름이 쓰여 있는 맥주잔에는 미로 같았던 구시가의 왕궁이 나오고.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역, 모레노 빙하로 들어가는 관문인 엘 깔라빠떼에서 산 컵과
한쌍의 정열적인 탱고,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분위기 있는 오래된 찻집, '또르띠니'의 커피가
마음을 또 그곳으로 떠나게 합니다.
스페인 세비아의 매혹적인 훌라멩고, 빌바오의 멋진 '구겐하임 미술관',
하얀 마을들인 '뿌에블로스 블랑꼬스',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사그라다 빠밀리아 성당' 들은 모두 특별했지만
산티아고 순례의 '프랑스 길'을 걸으면서 누렸던 마음의 평화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순례길, 남부 세비야에서 시작하는 '은의 길'과
스페인 북부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 길'도 걷고 싶었지만
이제는 체력에 자신이 없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미루기만 했었네요.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현란함과
라스베이거스의 휘황찬란한 밤도 다시 보고 싶은 풍경들.
애리조나 주의 그랜드 캐년과
유타, 아이다, 와이오밍, 몬타나의 네 개 주에 걸쳐 있는 옐로 스톤,
캘리포니아주의 요세미티에서는 그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러나 LA로 돌아오면서 들렀던 쏠 뱅은 오밀조밀 예쁜, 덴마크 이민 후손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지요.
칠레의 아따까마는 연중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흙먼지 폴폴 날리는 오지이지만
그 작은 동네에도 원주민의 독특한 문양을 담은 기념품 가게가 있었습니다.
추운 새벽, 안개 자욱했던 아그라의 기차역에서 마셨던 짜이,
그 맛과 장면까지도 기억나는 인도의 화사한 컵과
'룩소르 카르낙 신전'의 거대한 열주가 떠오르는, 이집트 신화가 섬세한 잔을 보면
어느새 번지는 입가의 미소!
흑백 에스프레소 잔 옆, 한 수도사의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행운의 상징인 포르투갈의 '갈로', 수탉 몇 마리.
파두는 언제 들어도 노래에 담긴 한이 서럽습니다.
중국의 메이리 설산 전망대에서는 '옴마니 반 메훔'을 외며 오직 그 산 만을 조각하던 장인도 만났었고.
체코 구시가에서 왕궁으로 가는 길, '카를교' 직전에 있는 '스메타나 기념관'에서
악보가 새겨진 이 컵을 샀을 때는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행여 깨질세라 애지중지 계속 끌어안고 다녔네요.
카를로비 바리에서 구입한, 온천물을 받아 마시는 빨대 잔은 미니어처랍니다.
코카서스의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밤 풍경이 그려있는 잔을 볼 때마다
깊은 산촌, 거친 길을 달려 오말로와 우쉬굴리로 떠났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전통음식인 '하짜 뿌리', 안에 치즈가 듬뿍 들어있던 그 빵은 언제 또다시 먹을 수 있을까요?
어디를 찍어도 누가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는 나라, 스위스.
도착 첫날, 레스토랑의 비싼 음식 값에 놀라서 그다음부터는 허리띠 졸라매고 슈퍼마켓에 드나들었지요.
야생화 가득한, 봄날의 향기로운 스위스 알프스 산길을 걸었던 일은 이제 아득한 꿈같네요.
뉴질랜드의 상징, 은고사리와 키위새가 보이는 이 화려한 에스프레소 잔들도 귀엽고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사온 고급스러운 컵도, 이천 도자기 거리의 감성적인 컵도 좋습니다.
오늘도 알바니아, 지로카스트라의 작은 카페에서는 빅토르가 여전히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내고
'천일야화'의 페르시아 땅, 이란에서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여 풍성한 저녁을 차려주었던 쉬라즈의 '사가르 부부'도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요?
주황색 도리이 숲이 인상적이었던 일본 교토의 신사,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에도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새 도리이가 계속 세워질 것이고
아르메니아의 자가용 택시 기사, 프로제 아저씨는
오늘도 예레반 기차역에서 또 다른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케냐의 컵을 사면서 그 커피숍에서
내게는 아직 미지의 땅인 코스타리카, 콜롬비아와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머그도 샀지요.
내 여행 추억이 담긴 진열장 안의 컵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여행 하나하나가 모두 내 인생에서 참 좋은 시절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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