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 후손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전주 여행의 시작, 이목대에 왔습니다.
이 일대는 전주 이 씨 시조인 이한 때부터 여러 대가 살던 곳으로
여기서 태어난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는 지역 관원과의 불화 끝에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함경도로 이주했답니다.
용비어천가의 해동 룡,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중 위 4대는 왕으로 추증한 것이지요.
이 동네에 남아 있는
이목대, 마을 초입의 작은 비각 안에는
이를 알리는 '목조대왕구거유지(木槽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 비석이 있습니다.
외세의 침탈로 혼란스러웠던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는 작업의 하나로
황실 성역화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조선의 뿌리인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지요.
이 비각은 원래 오목대 동쪽의 고지대에 있던 것으로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1986년에 옮겼답니다.
그들의 세거지였던 발산 자락,
교동의 옛 이름인
자만동에는 골목마다 벽화가 가득합니다.
유명했던 만화의 한 장면이나
풍경화들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던 이 동네에 젊은 화가들의 열정 담긴 벽화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의 일부와
고종의 이목대 설치와 연계하여 이 일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던 표지, 황실의 몰락과 함께
유명무실해진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 고종 친필) 비석 위에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자두(자두) 꽃 그림,
고종의 손자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비운의 이우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피우지 못한 오얏꽃'이라는
글도 보였네요.
전주 이 씨 후손들의 한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지요.
거기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오목대로 갑니다.
이목대는 주변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 동네는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목대랍니다.
원래 한 줄기로 이어진 동네인데 일제강점기에 산허리를 잘라 철로를 건설하면서 아예 분리되었습니다.
이 길은 역사탐방길로 오목대를 거쳐 한옥마을로 이어집니다.
오목대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남원 황산벌에서 왜구를 토벌한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땅에 들러 남아 있던 종친들을 초대, '대풍가'를 부르며 승전잔치를 열었던 곳.
'대풍가'는 중국 한나라 유방이 자신의 고향인 패군 풍현에서 천하 패권을 꿈꾸며 불렀다는 노래로
이성계 역시 선조들의 고향에서 대권의 야망을 내보였지요.
위화도 회군 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꿈을 담은 유적,
뜰의 비각에는 이런 내용을 새긴 고종의 친필 비석, '태조고황제 주필유지(太組高皇帝 駐畢遺址)'가 있습니다.
'태조고황제'는 1897년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입니다.
누각에 서면 한옥마을이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그들은 도로를 넓히기 위하여 전주성의 성벽을 허물었고
일본 상인들은 이 일대 상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자 뜻있는 전주의 유지들이 그들의 야욕을 막기 위하여 이 땅에 600여 채의 한옥을 짓고
조선인마을을 만들었답니다.
오목대에서 풍남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한옥마을의 태조로 주변에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4인용 전동카트를 빌려 타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오래된 한옥이 즐비한 거리에는
한복대여점과 각종 음식점에 카페가 많이 보입니다.
그 중심, '경사스러운 터'의 돌담을 따라
경기전에 왔습니다.
여기는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하여 1410년(태종 10년)에 지은 전각으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건합니다.
부속건물인 어진박물관에는 현존하는 영조, 철종의 어진과
사진을 보고 그린 고종과 순종,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세종, 정조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고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1439년(세종 21)에 설치된 전주사고에서는
조선왕조실록(복본, 25대 철종까지)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명령을 새긴 비석, 경기전의 '하마비'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암수 두 마리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여서 눈을 끌었네요.
정문으로 입장,
홍살문을 지나면
조선 왕조(1392~1910)를 개국한 태조(재위기간, 1392~1398) 어진을 봉안한 정전이 보입니다.
1872년(고종 9)에 그린 익선관과 청룡포 차림의 전신상(비단에 채색, 220 ×151cm)입니다.
1410년(태종 10)부터 모셨던 어진은 낡아서 조중묵을 비롯한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하였다지요.
여기서는 모사본을 전시하고 어진박물관에 보관 중인 진본은 특정 기간에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태조로 길 건너편에 있는 전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성당으로 순교지 위에 세운 성소입니다.
처형장의 돌로 이 성당의 주춧돌을 삼았답니다.
그러나 비극의 현장에 세운,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을 혼합했다는 이 성당은
웅장하고도 아름다웠습니다.
이 성당만큼이나 고풍스러운 사제관 앞에는 예수상과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의 조형이 보입니다.
전주성 4대 문 중에 유일하게 남은 남문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때 복원하면서
풍패의 땅 남쪽에 있는 문, 풍남문으로 불렀다네요.
앞에는 풍남문,
뒤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붙었습니다.
경기전에서 도보 5분 거리의 전라감영은 조선 시대에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을 총괄했던 지방통치기관으로
2020년 그 일부를 복원하였는데
정문 앞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진을 치며 사헌부의 지형, 현덕승에게 보냈던 서한문의 한 구절,
'국가 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를 새긴 글비,
'국가군저개고호남 약무호남시무국가(國家軍儲皆靠湖南 若無湖南是無國家)가 서 있습니다.
호남인의 자부심이 보입니다.
정문인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선화당.
그 동쪽으로 누각인 관풍각과 관찰사의 휴식공간인 연신당, 그 앞에 비장들이 집무하던 비장청에
뒤쪽의 안채, 내아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소나무 목조에서 송진이 배어나오는 3년 정도는 단청 처리를 할 수 없다 하니
그 후의 화려함이 기대되네요.
또 하나의 유적, '풍패지관'은
전주 이 씨의 관향인 조선왕조 발상지에 조성된 객사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건물 가운데에 태조의 전패를 모시고 있어 부임길 지방 고관들은 으레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렸답니다.
유방이 고향 패군 풍현에서 기병,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에 오르면서부터 제왕의 고향은
모두 풍패라 불렀고 그러면서 여기 전주 역시 풍패라는 또 하나의 별칭을 갖게 되었지요.
최명희길로 들어서서
전주 태생인 '혼불'의 작가, 최명희(1947~1998) 문학관에 왔습니다.
그의 강인한 의지가 보이는 편지 한 구절을 보며 입구를 지나
독락재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전시실이 있습니다.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추일하게 글을 쓰겠다'했던 작가는
집필 중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대표작, '혼불'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전 5부 10권, 한 칸 한 칸 써 나간 저 원고지 높이의 고단함은 상상할 수 없었지요.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자리, 남원의 '혼불문학관'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오밀조밀 예쁜 정원도 있었네요.
한국관 본점에서 맛있는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왕의 침전, '지밀'이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방들은 모두 조선 역대 왕들의 이름을 달고 있었네요.
내 방, 세종의 침실에서 내려다보는
전주천변의 신록이 화사했습니다.
밤에는 천변에서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리는, 전주 교외의 한적한 숙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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