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신자(1930~)는 '여자들의 가사'로 취급하던 '자수'의 폭과 깊이를 확장,
50여 년간의 활동 끝에 새로운 예술영역으로 승화시키면서
당당하게 우뚝 선 우리나라의 1세대 섬유공예가입니다.
섬유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려 치열하게 노력했던 한 예술가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장대한 전시회,
'이신자, 실로 그리다'를 보려고 다시 과천현대미술관에 왔습니다.
미술관에서는 작가의 작품활동을 작품의 변화에 맞춰 대략
1, '새로운 표현과 재료(1955~1969)'
2. '태피스트리의 등장(1970~1983)'
3. '날실과 씨실의 율동(1984~1993)'
4. '부드러운 섬유-단단한 금속(1994~)'의 4개 섹션으로 구분해 놓았지요.
작가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자수가 아닌, 자연과 정경을 단순한 구도의 밑그림으로 그리고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며 천 위에 다른 천을 오려 붙이는 아플리케를 하거나
자수와 염색을 하나의 화면에 담는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장생도'(1958),
'딸의 초상'(1962),
'탈의 표정'(1964),
'자연의 이미지 Ⅰ, Ⅱ'(1965),
'숲'(1971)들이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단순히 실로 천을 메꾸어가는 일반적인 자수가 아니라
직접 염색한 천에 실을 짜고 감고 뽑고 엮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실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지요.
'대한민국의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는 혹평을 들어가면서도 이런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네요.
그 과정의 마음고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노이로제'(1961)가 남아 있습니다.
2 섹션에서
작가는 1972년의 국전에 '벽걸이'(1970)를 출품, 우리나라에 태피스트리의 등장을 알립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태피스트리 단점을 보완, 올 풀기로 표면의 독특한 질감을 나타내거나
짜인 실을 밖으로 돌출하는 부조 표현으로 입체감을 살렸던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원의 대화'(1970)와
'원의 대화 Ⅳ ' (1973),
'부활'(1977) 같은 작품이 보였지요.
새로운 시도가 계속되면서 작품의 크기와 형태는 더 다양해졌습니다.
'날실과 씨실의 율동'으로 표현된 전성기,
경제발전의 급변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태피스트리가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태라 생각했던 작가는
흔들림 없이 고향 울진 앞바다의 일출과 석양의 강렬한 빛을 적색으로,
산과 나무의 형상을 노랑과 갈색 계열로 엮어 갑니다.
거기에 배우자의 투병과 사별로 인한 상실감, 절망, 생명에 대한 외경, 부활의 의지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로 나타냈습니다.
곡선은 직선으로 바뀌고 푸른색이 더해져 차분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까지
다양한 색상 배치와 활발한 창작활동은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
'청아'(1980),
'숲'(1985)과
'추억'(1985),
'메아리'(1985),
'山韻'(1987)과
'가을의 추상'(1987),
빛의 이미지(1987),
'여명'(1987)과
'여명 Ⅰ,Ⅱ,Ⅲ'(1988),
'화합'(1988)과
'화합 Ⅱ'(1990),
'무제'(1980~1990),
또 하나의 '무제'(1980~90),
'산의 정기'(1991)와
오른쪽, '산의 정기'(1999),
염색한 펠트 조각으로 입체감을 더한 '가을의 대화'(1997)가 보입니다.
한 올 한 올 손으로 엮어나가는 반복과 확인의 지난한 작업,
그 속에 담긴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색의 대비, 대담한 기하학적 구성과 입체적인 표현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거치면서 오랜 인고의 시간이 만들어낸 대작은
경탄, 그 자체였습니다.
그중에서 작가의 역량이 최고조를 이룬 작품은
1 원형전시실의 기둥을 감고 도는 길이 19m의 '한강, 서울의 맥'(1990~1993)!
팔당에서 서해에 이르는 한강변의 물줄기를 다루면서 서울의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네요.
'날실(경사, 세로줄)의 캔버스에 씨실(위사, 가로줄)은 붓이 되어
그 씨실의 색상만으로 표면에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는 태피스트리작업'은
'날실과 씨실의 아름다운 율동'이었지요.
말년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화면을 나누고 태피스트리에 나무나 금속을 고정하여 이질적인 재료 간의 조화를 시험합니다.
부드러운 곡선의 자연 이미지를 구현했던 전날의 작업과 달리
화면 분할과 강한 선의 반복으로 구상과 비구상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이는 작가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는 주제, '자연'의 시야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네요.
'희망 Ⅰ, Ⅱ'(2002),
'기원 Ⅲ, Ⅳ'(2007),
'산의 정기'(1996)와
또 다른 '산의 정기'(1996),
다시 이어지는 '산의 정기'(1996) 시리즈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울진 앞바다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과
아버지 손을 잡고 올랐던 산에는 파도 소리, 빛, 추억, 사랑, 이별의 모든 것이 스며 있었다'고 했답니다.
그 시절의 강렬했던 인상이 그의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된 듯합니다.
생의 말년, 작가의 회고에 마음이 저립니다.
작품 90여 점의 전시장 한쪽, 30여 점의 자료가 있는 아카이브 파트에는
관람객들에게 직조과정을 알리며 그 감촉을 느껴 보라는 체험의 장도 있습니다.
올 하나하나,
작가는 따뜻하고 포근한 섬유작업을 사랑하며 저 손으로 수많은 작품을 엮어 냈습니다.
자료 중에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 스케치와 구상도 보입니다.
창작에 대한 끝없는 열정이 느껴졌네요.
한평생, 가정과 직장을 오가는 벅찬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구상하고 엮으며 섬유예술의 위상을 높였던 노작가에게 경의를 바칩니다.
'문화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회 (0) | 2024.10.16 |
---|---|
과천현대미술관 전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0) | 2024.01.01 |
창덕궁, '달빛 기행' (0) | 2023.10.08 |
'서울 라이트 DDP', 빛의 축제 (0) | 2023.09.10 |
한 점 하늘, 김환기 회고전 (0) | 2023.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