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은 난해하여 접근하기 어렵지만 유영국의 '산' 시리즈는 좋아하는 내게
집 가까운 과천현대미술관의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발전 과정과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까지도 되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기하학적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한 경향'으로
서구에서는 피에트 몬드리안('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바실리 칸딘스키('노랑 빨강 파랑') 등의 작업을 통하여 세상에 등장,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의 중요한 경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 전시회에서는 우리나라의 기하학적 추상 미술의 역사를
1,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
2.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신조형파
3. 산과 달, 마음의 기하학
4.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의 4개 섹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에서는
1920~30년대의 경성에도 유럽의 신조형주의나 바우하우스를 체험하고 돌아온 작가들에 의해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이 전위미술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당대의 젊은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움과 전위의 상징'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지요.
서구의 이러한 경향은 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문학, 건축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극장의 고객 홍보용으로 새롭고도 세련된 이미지의 표지 디자인,
조선극장의 '조국 주보'(1929년 4월과 6월.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와
단성사의 '단성주보'(1929년 2월과 1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에
![]() |
![]() |
시사종합지인 '신인간' 표지(신인간사, 1927년 7월. 독립기념관 소장)와
'제일선' 표지(디자인 김규택. 보성사, 1932년 10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도 등장했네요.
![]() |
![]() |
이상(1910~1937)은
시인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창문사, 1936년. 화봉문고 소장)와
'조선과 건축'(조선건축회, 1930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시사종합지인 '중성'(중성사, 1929년 6월. 근대서지연구소 소장)의 표지를 디자인하면서
1930년 10월, 경성에 개점했던 미쓰코시백화점의 층별 안내도와 거대한 규모, 현대적인 면모를 처음 접하고는
'건축무한육면각체(AU MAGASIN DE NOUVEAUTES, '새로운 상품이 나오는 상점'의 뜻)'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당시 총독부 건축과 기사였던 이상은
백화점 내외부의 기하학적인 디자인과 건축의 신문물에 대한 인상을
'기존 언어의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신조어로 임의도형을 설계, 건축했다'는 해석의 이런 시로 표현하였지요.
이 시기에 김환기(1913~1974)는 기하학적 추상의 경향을 취사선택,
수직과 수평의 구도 이외에
곡선과 색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음악적인 효과의 '론도'(1938년)를 완성합니다.
그는 유영국(1916~2002)의 합판을 이용한 기하학적 부조의 작품에 대하여
'신흥 다방의 실내장식 같이 극히 유행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라 평가했다네요
두 사람이 동경에 있던 1930년대의 일본 미술계에서 기하추상을 전위미술의 받아들인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경성에서는 이제 인쇄물의 표지 디자인이나
다방과 백화점의 인테리어에 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평가는 순수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위계를 구분하는 출발점이 되었답니다.
유영국의 'Work'(1938년), '작품 LA-101'(1938년)과
이후 'Work'(1940년)과 '10-7'(1940년)에 그 과정이 보입니다.
2.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신조형파' 섹션에서는
해방과 한국 전쟁 등 격동과 혼란의 시기가 지나면서 이후 1957년에는 신조형파가 결성되고
제1회 '신조형파전'이 열렸음을 알립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바우하우스처럼 전쟁 후의 국가 재건에
화가와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연계하여
'작품활동을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지요.
이 시기의 작품으로
변영원(1921~1988)의 '반공여혼'(1952년),
변영원의 '전위정신'(1959년)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노력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전시회의 사진으로만 남았지만
세 분야의 예술가들이 연대하고자 했던 시도만으로도 그들의 활동은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했네요.
3. '산과 달, 마음의 기하학의 시기'에는
한국미술의 전통, 한국적 정체성을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연계하려는 다양한 시도의 그림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환기와 유영국은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인격의 반영'이라고 보는 문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김환기의 '달 두 개'(1961년)와
그의 '10-Ⅳ-68#10'(1968년), '23-ⅣⅤ-68#22'(1968년) 같은 자연이 지닌 부드러운 선이나
강렬한 색채와 선의 유영국 '산 시리즈'처럼 본질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그림, '마음의 기하학'을 그립니다.
왼쪽부터 '산-blue'(1994년), '산'(1994년), '작품'(1974년), '산'(1972년),
다시 왼쪽부터 '작품'(1967년), 산'(1968년), '산(남)'(1968년)과
'산'(1970년) 들이 그러했지요.
이런 경향은 그 외에도 이상욱(1923~1988)의 '무제 70'(1970년),
변희천의 '미상'(1969),
이준의 '달무리'(1979년),
김충선의 '무제'(1959년),
박길용의 '소'(1968년)
김창억의 '추상'(1969년)과 또 다른 '추상'(1970년),
전성우의 '색동만다라'(1968년),
하인두의 '혼불, 빛의 회오리'(1989년)에서도 보입니다.
4.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에서는
1960~70년대에는 산업, 건설, 과학이 발전하면서 미술계에도 시대적 상황에 적합하다는 인식 아래
크고 작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시 기하학적 추상이 확산,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도시개발에 미술가와 건축가가 협업을 이루면서
'회화, 조각, 건축의 종합적인 창조'에 기반을 둔 '한국조형작가회의'가 만들어졌고
거기에서 그들은 '기하학적인 추상을 국가 발전을 상징하는 미래적 이미지'로 제시했다네요.
이 시대에 한국의 전통과 기하학적인 추상의 접점을 고민했던 신진 작가들로
김인환의 '단청'(1972년),
색동의 이미지를 그린 박서보의 '유전질 No 4-68'(1968년)과 '유전질 No 2-68'(1968년),
색 대비를 강조한 김한의 '인테리어 10'(1968년),
조용익의 '68-112'(1968년)와
한묵의 '십자구성'(1969년),
최상철의 '무더운 여름'(1968년)과
196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 출품한 윤형근(1928~2007)의 '69-E8' 같은,
오방색과 우리의 전통적 패턴을 연상하게 하는, 전보다 더 화려하고 대담한 그림들이 나왔고
최영명의 '오(悟) 68-A'(1968년)과
변영원의 '합존 97번' (1967년),
이승조의 대작, '핵 G999'(1977년),
함섭의 '환원-71' (1971년),
기둥이나 파이프, 원자 구조의 배열처럼 보이는 김재관의 '운명 1970-1(70-2021)' 같은 실험적인 그림에
우주시대 개막으로 인한 또 다른 관심과 영감을 표현한 작품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변영원의 '미상 8'(1969년),
이성자의 '극지로 가는 길'(1987년),
한묵의 '금색운의 교차' 같은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디자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모호한 느낌의 작품도 있었지만
4개의 섹션에 작가 47명의 작품 150여 점에서
작가들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이 만들어낸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다양성을 확인하며
흥미와 감동의 시간을 보냈지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역동적인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이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이라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1층 좌우 전시실에서 중앙으로 나오니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엔지니어로 구성된 창작집단, '다운라이트 & 오시선'의
'마름모-만화경'(2023년)을 전시하고 있어
전시 그림들의 기하학적 추상을 재해석한, 어린 시절의 황홀했던 만화경을 다시 들여다보았네요.
디지털만화경입니다.
'관람객들이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을 동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되기를 바란다'는
설명에 공감합니다.
그 앞 1층 중앙홀에는 백남준(1932~2006)의 '다다익선'(1988년)이 있습니다.
1003대 모니터의 내구연한이 지나 오랫동안 꺼져 있던 과천현대미술관의 이 대표소장품은
그동안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2022년, 작가 출생 90년이 되는 해에 다시 켜 놓았습니다.
미술관 정문으로 나와
오른쪽에 있는 일본인 화가, 야오이 쿠사마의 '노란 호박'을 지나면
주차장 쪽으로 4호선 지하철의 서울대공원역 4번 출구와 연결되는 셔틀버스 탑승장이 있습니다.
과천현대미술관은 청계산 기슭에 있어 대중교통의 경우, 찾기가 불편하니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미술관 관람시간은 화~일, 오전 10부터 오후 6시까지, 월요일은 휴관.
겨울날의 과천현대미술관 원경!
'문화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회 (0) | 2024.10.16 |
---|---|
과천현대미술관 전시, '이신자, 실로 그리다' (0) | 2024.01.04 |
창덕궁, '달빛 기행' (0) | 2023.10.08 |
'서울 라이트 DDP', 빛의 축제 (0) | 2023.09.10 |
한 점 하늘, 김환기 회고전 (0) | 2023.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