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올라가는 분수와 물보라가 더위를 식혀주는 여름날입니다.
여기는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에 있는 저수지, '마장호수'.
출렁다리와 데크로드, 보도교와 하늘계단이 이어지는 4.5km의 순환로에는
중간중간 드나들 수 있는 일곱 개의 주차장이 있어 출입이 편리했지요.
우리는 제2주차장에서 시작,
개망초가 만발한 나무데크를 걸어
출렁다리를 건넜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저쪽에는 전망대가 있고 그 안에 카페와 빵집도 있습니다.
출렁다리 이용시간은 하절기(3~10월) 09:00~18:00, 동절기(11~2월)에는 09:00~17:00
출렁다리에서 내려 왼쪽의 보도교를 지나고
다시 나무데크를 걸어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정자에서 잠깐 쉬었다가
출렁다리가 보이는 맞은편 길을 들어섰습니다.
한낮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숲길,
다시 전망대에서 출렁다리를 건너서 이번에는 오른쪽까지 여덟 8 자 형태로 걸었지요.
수면을 바라보며 누구나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호수 둘레길이었네요.
둑길, '하늘계단'을 지나
호수를 돌고
'해바라기 꽃밭'을 찾아가는 길,
파주 법원읍 대능리 250-17번지, 얼마 전에 '해바라기꽃밭축제(6/23~6/24)'가 열렸던 곳입니다.
그리 넓지 않은 땅에 노란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수천 송이의 꽃 사이를 돌아다니는 행복한 시간!
작년 여름, 태백시 '구와구 동네'의 해바라기꽃밭에 갔던 일이 생각났네요.
축제 시기가 지나면서 찾는 이는 적었지만
화사한 꽃들은 지금도 여전히 좋았습니다.
해바라기꽃밭에서 법원읍 자운서원로에 있는 '율곡선생유적지'에 왔습니다.
입구에서 안내글을 읽고
배치도를 보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나란히 서 있는 뜰을 지나 기념관으로 갑니다.
율곡(1536~1584)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본가가 있는 이곳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합니다.
그는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구도장원공'이라는 찬사를 받았답니다.
1564년의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와 대제학, 호조와 병조,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지요.
그러나 그가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건국 200년이 지나면서 초심을 잃은 채 여러 가지 폐단으로 방향을 잃었고
그에 대하여 율곡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워 개국 초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며 '경장론'을 주장합니다.
서슬 퍼런 붕당의 와중에서 그는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지만 선조의 특별한 신임과 사심 없는 공정한 일 처리로
큰 사건 없이 무난하게 벼슬살이를 하면서 4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임금이 내린 '문성'이라는 시호에 1681년에는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지요.
퇴계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인재등용, 군사개혁, 노비문제 등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그의 개혁에 대한 주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기 전시는 조선 중기 당시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개혁가, 율곡의 삶을 조명하는 자리랍니다.
기념관 앞에서
그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현재를 살피는, 온고지신의 배움터가 되기를 바란다는 서문에 공감하면서
그가 황해도 해주 고산의 석담에 은거할 때 지었던 10수의 연시조,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학문과 진리 탐구를 권장하는 '고산구곡가'와
그 소재의 일부인 '관암도' 그림을 보며 전시실로 들어갑니다.
'왕도의 학문'을 엮은 '성학집요'에서는
공자가 '중용'에서 밝혔던 '세상을 다스리는 아홉 가지 보편적인 원칙',
'자신을 수양하고 어진 이를 존경하며 친족을 아끼고
대신을 공경하며 신하를 내 몸과 같이 여기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온갖 공인을 불러들이고 먼 데서 온 사람을 편안히 해주고 제후를 회유할 것'을
임금에게 권유하고 있었지요.
거기에 여러 저술을 통하여 '민본덕치'와 '공론에 의한 정치의 중요성'을 알리고
지금이 개혁의 시기임을 주장하였으며
'붕당의 폐해'와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에서
氣 보다 理가 더 중요하다는 '主理論', 경제보다 윤리, 현실보다 이상, 물질보다는 정신을 더 중요하며 인간의 도덕적 이성을 중시했던 퇴계와 달리 理와 氣의 두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理氣論'을 주장하면서
백성이 잘 살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개혁을 강조, 그 방향을 임금에게 제시하였다지요.
그러나 율곡의 이러한 충심이 현실의 벽 앞에서 얼마나 실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네요.
조선시대에 율곡을 모신 서원은 해주의 '소현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에 20 군데가 넘었답니다.
그중에서도 파주의 '자운서원'은 효종에서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묘정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 정비한 것입니다.
전시실에는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이 보입니다.
'자운서원'의 '자운문'에 들어서서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가면 강의실인 '강인당' 아래 양옆으로 제자들의 거처인 '수양제'와 '입지제'가 있고
강인당 양 옆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이 서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강인당을 돌아
우암 송시열이 짓고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쓴 '묘정비'와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 '문성사'.
율곡의 영정이 보입니다.
거기에서 나와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있는 율곡과 부인 곡산 노 씨의 합장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묘 등 가족묘를 일별하고
파주 율곡의 또 하나유적지, 임진강변의 파평면 율곡리 절벽에 서 있는 '화석정'에 왔습니다.
현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가 보입니다.
전망 좋은 정자 앞, 왼쪽 끝에는 모래섬인 '초평도'가
오른쪽으로는 '율곡습지공원'과 '전진교' 주변의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집니다.
정자 옆에는 '덕수 이 씨' 세거지인 여기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했던 율곡이
8세 때 이 정자에 와서 지었다는 시비가 보입니다.
밤나무가 많은 율곡 마을, 고향을 사랑했던 그는 자신의 호에 이곳의 지명을 붙였습니다.
지난봄, 임진각의 '평화누리 공원'에서 시작했던 'DMG 평화 걷기' 행사 때는
남방한계선의 철책길, '임진강변 생태 탐방로'를 걸어 초평도를 지나고 이 '화석정' 밑을 지나서
율곡쉼터(율곡습지공원)까지 갔었지요.
새삼스러웠네요.
청국장과 비지장이 이 상에 추가되었던 파주 시내 한 식당의 '장단콩 두부정식'은 아주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