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산 자락에 있는 도피안사입니다.
이곳은 통일신라 말 경문왕 5년에 도선대사가 창건한 작은 사찰로
대적광전에는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 앞마당에는 보물인 ‘도피안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한 대한독립 애국단의 철원 지부가 여기서 결성되는 등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면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사찰이었네요.
화려한 단청의
종각을 지나면
'백마고지 전몰장병을 위한 도피안사 수륙재'를 지낸다는 대적광전이 나옵니다.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장병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리는 일 또한 고마웠지요.
전장에서 어린 나이에 산화한 젊은이들이 저 세상에서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기를 기원합니다.
대적광전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고
불상 뒤로 화엄경 설법 장면을 그린 탱화가 보입니다.
지금의 철원 땅에 수도를 정했던 태봉국의 궁예가 꿈꾸었던 미륵의 세상은
이상 세계 도달을 염원하는 도피안사의 절 이름과 같은 맥락이었겠지요?
창문의 문살처럼 아름다운 세상, 그러나 궁예의 꿈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짧게 끝났습니다.
도피안사에서 소이산(해발 362m)의 '철원역사문화공원'에 왔습니다.
한국전쟁 후 60여 년간 산 전체가 벙커로 활용되면서 민간인은 그동안 출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철원시에서 이 일대를 철원역사문화공원으로 정비, 지난 7월에 개방하면서
그 안에 일제 강점기의 철원 시가지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고색창연한 우체국과
그 옛날, 금강산 유람의 거점이었던 여관들,
그 당시의 명칭, 보통학교에
교실 모습도 보이고
정오가 되면 사이렌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던 탑, 오종포 옆에는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하여 배뱅이굿 이은관의 데뷔 무대였던 철원극장도 있어
지금도 주말이면 변사와 함께하는 무성영화를 감상할 수 있답니다.
마을 안쪽으로 양장점과 약국, 일반 주택들이 보입니다.
대광리와 월정리의 중간역이었던
옛 철원역의 대합실을 재현해 놓은 철원역에서 소이산에 올라가는 모노레일 승차권을 사면
5분 거리의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왕복 1.8km, 탑승료는 성인 5,000원이지만 철원사랑 상품권 2,000원을 돌려줍니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지뢰꽃길’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간당 8대가 오가지만 평일인 오늘도 매시각 매진, 매진입니다.
naver에서 사전 예약할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아슬아슬 마지막 승차권을 구입하고는
출발까지 거의 시간반을 기다렸네요.
드디어 우리가 탄 모노레일은 평화공원과
벼가 익어가는 노란 들판을 보며
천천히 레일 위를 가고 있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1.5km 거리의 전망대에 올랐다가
이 평야지대의 지질을 설명하는 글을 읽어 보고
다시 1.5km를 걸어
소이산 정상인
탐방안내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철원 북쪽의 오리산(453m)에서 화산 분출로 생성된 용암지대,
철원평야에는 이미 가을로 들어섰습니다.
군데군데 벌써 수확을 거두면서 비어있는 땅도 보입니다.
이 땅에서는 품질 좋은 철원 오대미가 생산된다네요.
멀리 삼자매봉과 김일성고지, DMZ 라인(남방한계선), 옛 철원군청 터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철원역사문화공원 건너편에는
광복 후 1946년 철원군 전역이 소련군정 치하에 들어갔을 때 세운
러시아 스타일의 조선노동당 철원당사 3층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져 검게 그을린 채 곳곳에 탄흔을 남기고 있었지요.
그 옆, 철원경찰서가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아 있고
거기에서 시작되는 이태준의 소설, ‘촌뜨기’ 속의 공간을 따라가는
5.4km, 도보 2시간의 산책길, '촌뜨기 길'이 있습니다.
일제의 집요한 착취로 삶이 팍팍해진 농민, '장군'이의 이야기가 안내판을 따라 이어집니다.
차로 5분 거리의 백마고지 역은 역사만 남아 있을 뿐,
열차 대신 연천행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이 보였지요.
여기에서 소이산으로 걸어가는 1시간 20분 거리의 안내도가 있습니다.
역에서 백마고지 전적지로 가는 길의 중간, ‘두루미평화관 ’ 앞뜰에서는
이태준(1904~?)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세운 ‘상허 이태준 문학비’가 흉상 옆에 같이 서 있습니다.
이태준은 ‘달밤’ ‘돌다리’ 등의 단편과 장편 외에 수필집 '무서록', 명저인 '문장강화'를 남겼지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기자로 활동하면서
1933년 이효석, 정지용, 유치진 들과 순수문학 그룹인 구인회를 결성, 집필 활동을 했지만
해방 직후에는 현실참여로 방향을 틀면서 결국 1946년 가족 동반 월북, 1956년 북한에서 숙청을 당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적 고통을 간결하고 호소력 있는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퇴고를 되풀이하여 소설의 기법적 완숙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되는 분입니다.
문학비는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이 위대한 문학자의 자취는 지금도 묘연하다.
이제 그의 나이 100세,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이 고독한 ‘경계인’의 문학과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로 끝났습니다.
1988년 이태준 해금 이후
문학관장인 향토시인, 정춘근은 이태준의 단편, ‘촌뜨기’의 배경을 찾아
그가 살던 용담마을에서 경찰서와 관전리로 이어지는 ‘촌뜨기 길’을 만듭니다.
거기에서 백마고지 전승비가 맞아주는 '백마고지 전투기념관'에 왔습니다.
여기는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에 맞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철원 서북방, 이 395 고지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15일까지 열흘간 이 고지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12차례의 전투 끝에
UN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 마침내 고지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은 3146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중공군도 1만 4천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네요.
극심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 이 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불렀답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언덕 위에
'백마고지 전적비'가 있습니다.
전사자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 있는 비석을 보며 마음은 먹먹해졌네요.
그 옆의 6.25 시계는 6시 25분에 멈췄습니다.
천하무적 5사단을 상징하는 '열쇠'가 그 시절의 무용담을 들려주는 듯합니다.
잠겨 있는 작은 기념관 문틈으로
육탄 3용사인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의 살신성인을 기록한 전투 활약상과
그들에 대한 노산 이은상의 '추모의 시',
당시 격렬했던 전투 상황을 보도한 '시산혈하(屍山血河)의 백마고지 전투'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보입니다.
전적비 뒤의 정자 '상승각' 안에는 '자유의 종'이 보이고
이어 'DMZ 평화의 길'이 시작됩니다.
'DMZ 평화의 길'은 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있는 남방한계선과 MDL(군사분계선)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로
지정된 일자와 시간에 한해 제한된 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특별한 답사길.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와
남북을 경유하여 흐르는 역곡천에 주변 평야가 잘 어우러진 자연경관,
휴전 후 최초로 비무장지대 내에서 시범적 남북 공동 유해발굴이 진행되었던 '화살머리 고지'까지
도보와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돌아보는 뜻깊은 길입니다.
사전 예약은 필수, www.durunubi.kr
저 앞에 보이는 1.5km 거리의 백마고지 전망대까지 가고 싶었지만
곧 출입통제 안내를 만나면서 미리 탐방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눈앞에는 피로 되찾은 가을의 황금 들판이 펼쳐졌습니다.
'통일아, 평화야, 철원아'
비탈에 새겨 놓은 구절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듭니다.
'육탄 3용사'의 희생으로 돌파구가 열렸던 열흘 간의 처절한 전투 끝에 이루어낸 승리,
국기 게앙대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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