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하순, 충남 홍성에 나들이 왔습니다.
이 지역이 자랑하는 볼거리는 모두 12개,
먼저 남당항을 거칩니다.
여기는 가을 대하, 겨울 새조개 축제로 유명한 포구,
넓은 천수만 안에 있어 대하, 우럭, 새조개, 꽃게, 새우 등의 해산물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 바다 매립지에 조성한 해양공원에서는 국내 최대의 물놀이 음악 분수, 거울의 왜곡을 즐기는 트릭아트 존, 그물망 위의 놀이터인 네트 어드벤처들을 즐길 수 있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당항에서 어사리 노을공원까지 1시간, 서해랑길 63코스의 일부를 걷고 거기에서 차로 이동, 홍성 스카이타워에 갈 계획이었지요.
서해랑길 63코스, 11.2km의 중간입니다.
식당가를 지나고
항구를 바라보면서
해안의 무지개 빛깔 나무데크 길을 걸어
100여 미터 정도의 곡선을 그리며 바다 위로 돌출한, 남당항의 노을전망대에 들렀습니다.
일몰의 명소인 이 전망대 아래로 해수욕장이 길게 이어집니다.
멀리 우리의 목적지인 스카이타워가 보입니다.
또 다른 전망대를 지나
조형물, '남녀의 행복한 시간'이 있는 어사리 노을공원 앞에서 승차,
낙화 분분한 겹벚꽃길을 달려
속동해안공원 안에 있는 지상 50m의 스카이타워에 도착하였지요.
사방으로 트인 이 전망대에서는 서해안의 천수만 안,
'놀궁리 해상파크'인 공리항과
A지구 방조제에
안면도,
홍성의 또 다른 명소, 죽도가 보입니다.
타워 바로 앞 작은 모섬의
만개한 진달래꽃도 고왔네요.
여기 정상도 역시 낙조의 명소!
선수 모양의 포토 존이 있어 재미있는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홍성은 최영, 성삼문, 하용운, 김좌진, 이응노와 명고수인 한성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땅입니다.
먼저 독립운동가이며 승려, 시인인 한용운(1879~1944)의 생가입니다.
기념관의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월요일은 휴관.
그 안에는 연대별로 정리한
만해의 일생이 보입니다.
선친에게 의를 배우던 시기의 결심에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하여 스님이 되기까지,
그리고 불교에 입문하여 불교계 개혁에 나서면서 현실 참여를 주장,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3.1 독립선언을 이끌었던 시기,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여 민중들에게 불교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시기 등, 그의 일생을 60여 점을 유품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지요.
그중에는 자필로 정리한 10폭 병풍, '만해한용운선사십우송'도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尋牛)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그것을 칠언절구의 병풍으로 만들어 늘 가까이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거처 이름도 심우장(尋牛莊)이라 불렀습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만해의 이 심우장은 남향이 아닌 북향집.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게 된다며 거부, 산비탈에 지은 북향집에서 만해는 독립을 앞둔 1944년 6월 입적합니다.
공원 안에 설치한 기념탑에는
3·1 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의 얼굴과
불교계의 대표였던 만해가 작성한
![]() |
![]() |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이 보입니다.
그의 동상 한쪽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그 위로 삼문을 지나면 사당, 만해사가 있습니다.
![]() |
![]() |
기념관 안에는 1963년 추서된 건국공로 훈장도 있습니다.
그는 '님의 침묵' 등 300여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저항시인이었고 불교계의 혁신과 대중화, 대장경의 한글화를 이끌었던 학승이었습니다.
숲 속에 조성된 '민족시비공원'은
애틋한 시어로 독립을 꿈꾸었던 한용운의 대표 시, '복종'과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에
![]() |
![]() |
변영로, 심훈, 이상화, 심훈, 윤동주, 조지훈 들의 시비, 20개가 설치된 문화산책길입니다.
![]() |
![]() |
![]() |
![]() |
근처에 있는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터에서는
매년 10월 25일에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서 최고의 전과로 기록한 '청산리 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추모제를 진행한답니다.
생가를 비롯하여 백야기념관과 공원, 사당이며 시비는
장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1년 복원하고 건립했다지요.
기념관 입구에는 장군의 흉상과 청산리 전투를 표현한 부조가 보이고
전시실에는 탄생부터 결혼, 가노 해방, 토지 재산 분배와 호명학교 설립을 통한 애국계몽운동, 임정 군자금 모금 관련으로 일경에 체포된 2년 6개월의 투옥과 만주 망명,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 연합군을 이끄는 등 일본군과 교전하여 여러 번 승리하면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업적이 나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 6일간의 청산리 전투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설명이 특별합니다.
남다른 의식으로 학교를 세워 민족을 일깨우며 직접 항일전쟁에 뛰어들었던 분이었지만 그러나 1930년 고려공산당원인 박상실의 총에 맞아 4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합니다.
이때 장군은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기며 끝까지 나라를 걱정했다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백야공원에는 시기를 나누어 장군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판에
![]() |
![]() |
그를 추모하고 숭상하는 기념사업을 기록해 놓았지요.
앞뜰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시기, 장군의 소회 담긴 어록비가 있습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 버릴 길 없구나
어린 시절부터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당시까지, 장군 일생의 동상이 서 있는 길 끝에는
장군의 사당, 백야사가 있고
![]() |
![]() |
그 안에 장군의 초상이 있었지요.
생가의
대청에 걸린 액자, '靑白傳家八百年'에서는
노복 30여 명의 종문서를 태우며 그들에게 먹고살 만한 땅을 나누어 주었다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한 젊은이가 보입니다.
홍성에서 태어나 전통 서화로 예술에 입문했지만
서양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문자추상의 세계를 개척하면서 세계적 예술가로 인정받았던 '이응노(1904~1989)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날은 4월 23일,
전시관 앞에는 '가나아트 이호재 기증특별전' 이후 전시품 교체에 들어가면서 임시 휴관, 29일에야 다시 문을 연다는 안내가 보일 뿐이었지요.
그 옆의 생가를 찾았다가 벽에 걸린 이 글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1965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북한공작원의 말에 속아 동베를린에 간 것이 화근이 되어 '동백림 사건'에 휩쓸리면서 국내로 송환되었지요.
1969년 3월에 광복절 특사로 형집행 정지가 될 때까지 2년 반의 옥중 생활 속에서도 그는 간장과 휴지, 밥풀 등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답니다.
사면이 된 그해 5월 프랑스로 돌아간 얼마 후 그는 국적을 바꿨습니다.
20년이 넘은 1988년, 비로소 동백림 사건의 연루 혐의가 풀리면서
그는 귀국전을 준비하는 도중인 1989년 1월, 세상을 떠납니다.
외로이 떠도는 구름, 고운 최치원(857~)의 삶도 쓸쓸하였습니다.
일찍이 당나라로 유학, 文名을 날렸지만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지요.
여기저기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홍성 장곡의 그가 잠시 머물던 월계에도 바위 위에 새긴 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었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마모되어 이제는 글자를 읽기도 어려웠네요.
'人百己千',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하겠습니다'.
서기 868년, 신라 현강왕 때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가는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말에 치원은 '남보다 열 배의 노력으로 성공하겠습니다'라 약속했답니다.
마을주민들은 그 말을 바위에 새기고 '문창후최치원선생제단'을 만들어 이 작은 공원을 돌보고 있습니다.
'국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산, 3 (0) | 2025.05.14 |
---|---|
보령 (0) | 2025.05.13 |
수월봉과 관음사 (0) | 2025.05.08 |
선흘 곶자왈(동백 동산)과 4.3 평화기념관 (0) | 2025.05.06 |
성산 일출봉과 제주목장, 바농오름 (0) | 2025.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