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가을입니다.
샛노란 빛깔의 들판은 넉넉하고 평화로웠지요.
강화도와 교동도, 석모도 일대의 관광지도를 보면서
먼저 신미양요의 광성보와 더불어 병인양요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정족산성으로 갑니다.
원래 이름은 삼랑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 부여와 부우, 부소가 쌓았다 하여 붙은 이름의 고대 토성이었지만
후대의 백성들이 호국의 염원을 담아 다시 쌓으면서 튼튼한 돌성이 되었고
그 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한 전등사가 있습니다.
이 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 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요새였습니다.
여기는 '종해루' 현판을 달고 있는 남문입니다.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 성의 길이는 2.3km로 동서남북 각 방향의 성문에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산성 북쪽에서 황해도와 개성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네요.
전등(傳燈)이란 '불법의 등불을 밝힌다'는 의미로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서기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이후
1600여 년간 몇 차례의 소실과 재건, 개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단군 신화의 연원으로 우리 민족과 역사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입니다.
부처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고려 대몽항쟁의 근본도량이 되어 16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1678년에는 경내 '정족산 사고'에 조선 시대의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이 되어 왕실의 족보가 담긴 '선원보각'을 지켜냈으며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격동의 근대사에서 나라를 지켰던 역사의 현장이었지요.
종루를 지나면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격조 있는 대웅보전이 나옵니다.
이 건물은 네 귀퉁이를 장식한 나부상과 내부 기둥의 묵서들이 특별했습니다.
나부상은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했던 도편수가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에게 돈과 사랑을 잃고 난 다음
처마 네 군데에 지붕을 떠받치는 벌거벗은 여자를 조각해 놓은 것.
물욕에 눈이 멀어 배신한 여자를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대웅전에서 들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바르게 살아가라는
그의 종교적 사랑과 염원을 표현하였다네요.
대웅전 내부의 기둥에 남아 있는 낙서처럼 보이는 붓글씨들은
병인양요 때 전투에 임한 병사들이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고 무사 생환하기를 간절하게 빌면서
써 놓은 이름이랍니다.
마음 아픈 장면이었지요.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무사히 가족이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역사 오랜 고찰답게 무성한 숲 속에 들어앉은 절집에서는
정갈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정족산 사고'로 올라갑니다.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의 네 군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임진왜란의 와중에 유일하게 보존되었던 '전주사고본(181 책)'이
1660년 여기 정족산 사고로 옮겨지면서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전등사 스님들이 그 실록을 토굴 속에 감춰놓고 결사적으로 지켜냈고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 이관되었습니다.
실록을 보관했던 건물은 '장사각',
오른쪽은 왕실 족보와 문서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고는 출입금지.
열쇠로 굳게 닫혀 있어 담 너머로 일부만 볼 수 있었네요.
사고 문 앞의 숲과 서해바다 조망이 좋습니다.
대웅보전 앞에서 만난 보살님의 권유로 공양간에 가는 길, 시래기 건조장은 또 하나의 특별한 풍경이었네요.
저 시래기로 만든 맛난 장국 드시고 모두 성불하시기를!
때를 넘긴 공양간은 조용했고
벽의 그림은 극락이었지요.
산성의 동문 안쪽에는 병인양요의 승전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습니다.
조선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해군 특전대 600여 명을 파병, 강화도에 상륙하였으나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정족산성의 남문과 동문 전투에 패배, 분탕질 끝에 결국 철군하게 됩니다.
잠긴 문살 틈으로 '순무천총 양공헌수 승전비'라는 글씨가 보이네요.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웠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는 뒷면은 벽으로 막혀 있어 내용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가을색이 짙어지는 경내는
하얀 색의 개미취와
억새들이 가득한 멋진 정원입니다.
연근과 마, 통팥으로 만들었다는 사찰음식, '연꿀빵'을 사 들고
다시 남문으로 내려갑니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정중앙 지점, 해발 472.1m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 마니산에 왔습니다.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리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답니다.
매년 개천절에는 개천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전 때에는 성화를 채화하는 곳입니다.
등산로는 '함허동천 능선로', '계곡로', '정수사로'에
여기서 올라가는 '천사계단로'와 '단군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니산 입구에 조성된 1km 거리의 치유의 숲을 걸었습니다.
단군의 이름이 붙은 '단군 놀이터'를 지나는 노란색 표시 길입니다.
길 초입에는 천신인 환인의 뜻에 따라 그 아들 환웅이 천부인(天符印)을 받아
풍객, 우사, 운사(바람과 비, 구름)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정한 이래
국조 단군이 하늘과 땅, 사람의 변화 이치를 밝힌 경전,
홍익인간의 대업을 시작한 고사에서 유래한 민족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 전문이 보입니다.
81자의 난해한 숫자와 교리를 담고 있어 해석이 구구하지만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대 우리 민족의 종교관, 우주관, 철학관을 담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네요.
'신단수 쉼터'를 지나자
등산로 양쪽으로 '2022년 제9회 대한민국 단군 서예대전' 수상작이 10월 1일부터 전시되고 있었지요.
수많은 작품을 감상하는 길 끝에
'민족의 웅장한 기를 담은 개천 마당'이 있습니다.
민족의 성지인 정상의 참성단을 그대로 본뜬 모형과
성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성화대가 있습니다만 여기도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조용했습니다.
그 앞에는 천부인 광장이 있습니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리라'며 천신인 환인이 환웅에게 주었다는 天符印
- 악귀 쫓는 권세를 상징하는 청동거울과 청동기 문화였던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
잡귀를 쫓는 의례용 방울인 청동방울-이 단군과 호랑이, 곰과 함께 등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355년 전인 기원전 2333년,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왕검은 이 땅에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세웠습니다.
신화 속의 '신단수' 모형도 보이네요.
신단수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수목신앙으로 변형되면서
큰 나무에 북과 방울을 달아놓은 신성한 지역, 소도가 됩니다.
다시 이동,
한때 수국이 소담스러웠을 카페의
분홍빛 구절초가 피어 있는 정원에서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싸이프러스를 보며 남프랑스 여행을 추억하는 시간입니다.
시원스러운 통창 너머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들판과 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근처에 고려 시대의 문장가인 이규보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가 쓴 한문 수필, ‘슬견설(虱犬說)’은
이(虱)와 개(犬)의 죽음을 놓고 손(客)과 내가 논쟁을 벌인 이야기를 통하여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보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담았지요.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수필인 ‘국선생전(麴先生傳)’,
집 고치는 일상적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이옥설’ 등이 전해집니다.
사당, '유영각' 안에는
사후 임금에게 '문순공' 시호를 받은 그의 초상화가,
저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묘소 오른쪽에는 '사가제' 현판과 그 안쪽 '백운제' 현판을 단 한옥이 보입니다.
'사가제'는 개경에 살았던 이규보의 별장 이름으로 후학을 양성하던 학당이었습니다.
온수 공영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강화 나들이길, 3코스인 '고려 왕릉 가는 길'은
성공회 온수 성당과 길정저수지를 지나 이곳에 들렀다가 석릉과 가릉으로 이어집니다.
길정 저수지길은 '2015년 전국 아름다운 숲길 베스트 10'에도 뽑혔던 멋진 숲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