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북단에 있는 '강화 평화전망대'입니다.
입구, 해병대 검문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한 후 '민통선 임시출입증'을 받아 들고
그 뒷면에 보이는 우리 젊은이들의 강인한 표정에 든든한 마음으로
민통선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가 있는 강화도의 양사면 철산리 일대는 그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땅이었으나
'민족 동질성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 구축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08년 9월 전망대를 개관',
이제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을 읽으며 전망대가 있는 3층부터 찾았지만
고성능 망원경으로도 오전 시간, 큰 일교차로 안개가 끼면서 시계가 좋지 않았기에
거기 해설사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다음
아예 뜰로 나왔습니다.
여기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2.3km,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 강 건너 북한 마을의 학교, 회관, 주택들을 볼 수 있으며
망원경으로는 농사일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주민의 움직임까지 확인할 수 있답니다.
정면으로 멀리 어렴풋하게 송악산이 보입니다.
그 아래에 개성시와 개성공단이 있다지요.
전망대에서 개성시까지의 직선거리는 겨우 18km, 강화도 남단의 마니산보다도 가까운 거리라 했네요.
예성강 하구 옆으로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인 황해남도 배천군과 연안군의 연백평야가 넓게 이어지고
그 앞에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세 강물이 합수하여 서해로 흘러갑니다.
오늘은 저 강 건너 연백군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이 망배단에서 망향제를 올리는 날인 듯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말없이 고향 땅을 바라보는 저분도 연백에서 왔다 하셨지요.
그 옆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와
제적봉 비가 보입니다.
1966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이 고지 이름을 제적봉이라 명명,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은 친필 글씨를 남겼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공산 침략자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통치자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이름입니다.
제적봉과 나란히 서 있는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연성(지금의 연백)에서 의병장, 이정암(1541~1600)이 이끄는 부대가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부대와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은 승전비, 연성대첩비.
연백군에서 온 실향민들이 망향과 통일 기원을 담아 그 승전비를 1977년 이곳에 다시 세웠고
그 옆에는
조국의 광복과 자유 독립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조직한 의성단의 단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애사 편강렬 추모비가 있습니다.
만주 지역과 경상도, 평안도에서 일경에 맞서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흩어진 무장항쟁 조직으로는 효율적인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 통합 활동을 하다가 하얼빈에서 다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의 혹독한 고문으로 1928년 1월 16일 향년 36세로 순국하신 분입니다.
법정 최후 진술에서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던 애국지사이셨지요.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분의 순국을 기렸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되찾은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서
'월곶돈대'로 갑니다.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강화도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돈대 중에서
월곶돈대는 폭 47m, 남북 길이 38m의 타원형을 이루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에 조성되었습니다.
그 아래의 월곶 나루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네요
돈대의 서쪽 하단부에는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정상의 정자, '연미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가을꽃들이 한창입니다.
고려시대에 지은 '연미정'은 강화도 동북단인 이 월곶 앞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흐르다가 다시 서해와 인천 쪽으로 나뉘어 흘러가는 물길의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
날렵한 기와지붕의 연미정은 이런 한강 하구의 멋진 경치를 보여주는 강화 10경의 하나로
탁 트인 풍경과 정자를 둘러싼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한가로워 보였지만
이곳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 조약을 맺었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온 강화 원도심의 '고려 황궁 옛터 마을'입니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년), 당시 세계를 평정하던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개경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 1km 남짓인 바다를 방패 삼아 강화성을 쌓고
그 안에 왕궁을 지으면서 호국의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군량미를 생산하며
고려 원종 11년(1270년) 환도할 때까지 38년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결국 몽골의 세력에 항복,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강화조약의 한 조건이었던
강안전, 경녕궁, 건덕전 등 방대한 규모의 고려 왕궁을 모두 허물게 됩니다.
조선 시대에는 황폐해진 고려 궁터에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 창년전, 만녕전의 행궁을 짓고 강화 산성 안에 동서남북 4개의 문을 만들어
백성의 출입을 제한했지만 1636년의 병자호란과 1866년의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역시 소실되었다네요.
현재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문), 첨화루(서문), 망한루(동문), 진송루(북문)의 사대문을 복원해 놓았고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과
'외규장각', '강화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강화도 종각' 들을 계속 복원하고 있습니다.
'명위헌' 현판이 걸린 조선 시대의 관아, 동헌에는 밀랍인형으로 만든 실물대의 강화유수와 별장들이 보이고
성문의 개폐를 알렸던 높이 198m , 입지름 138m의 '강화부종'은 외관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었지요.
'외규장각'은
1762년 조선 시대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설치한 국가도서관, 한양 창덕궁의 '규장각'에 이어
강화도의 지은 별도의 도서관입니다.
왕실의 혼례, 세자의 책봉, 장례, 궁궐의 건축과 같은 국가 중요 행사의 전말을 그림을 곁들여 기록한 '의궤'를 비롯한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습격으로 의궤를 비롯한 수많은 서적이 약탈당하거나 소실됩니다.
의궤는 곡절 끝에 프랑스 도서관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거기 사서로 근무하던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발견, 제보하면서 민간단체와 우리 정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영구 대여 방식으로
현존하는 297 책이 2011년 5월, 145년 만에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외규장각의궤'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강화의 외규장각은 그 해에 복원됩니다.
고려궁터에서 가까운 '용흥궁'은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어릴 때 살던 초가집으로 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한 살림집, '잠저'입니다.
철종은 1849년 후사가 없이 죽은 24대 임금, 헌종에 이어
순원왕후가 영조의 유일한 혈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19세의 젊은이,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임금이 되었지요.
사도세자의 비극 속에서 온 가족이 유배되었거나 죽임을 당했던 와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무력했던 철종은 후손도 없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고양시의 예릉에 묻힙니다.
용흥궁 옆에는 1900년에 축성되어 지금은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대한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습니다.
목재로 골격을 만들고 벽돌을 쌓아 올린 이 기와집은 현존하는 한옥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내부는 서유럽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동서양이 공존하는 건물입니다.
지금까지 매주 주일 미사가 진행되고 있답니다.
주련에는 '만유진원', '하느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참 근원'이라는 구절이 보이고
두 줄로 늘어선 기둥 옆으로 회랑을 두고 중층에 유리창을 내어 자연채광을 받을 수 있게 만든 내부에
문 앞에는 '作善, 去惡, 洗心, 修己'를 새긴 세례대가 있습니다.
1900년, 제3대 조마가 주교가 지었다는 이 성당 안에는
100여 년 전의 사진들, 영세와 견진을 받은 신도들과 알마 수녀 등 이 성당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네요.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한옥 사제관 앞의
'라브린스'.
이는 고대부터 그리스, 켈틱, 마야 문명의 여러 신전과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도 전해 오는 것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미로 같은 길을 따라서 묵상과 기도를 하거나 치유를 위하여
천천히 중앙을 거쳐 다시 돌아서 걸어 나오는 경건한 의식의 순례입니다.
신자들은 성당 입구의 돌벽에 새겨진 라브린스를 손가락으로 짚은 다음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였다지요.
성당 옆으로는 '강화나들길', 제1코스가 이어집니다.
성당이 자리잡은 고지대에서는 강화 시내와
바로 앞의 용흥궁이 내려다 보입니다.
강화도 맛집의 점심도 특별했네요.
네이버로 사전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이 식당에서
강화의 토산품인 속노랑고구마와 순무를 넣어 만들었다는, 장식도 화려한 백짬뽕과 탕수육, 짜장면을 먹고
석모도에 왔습니다.
오늘의 숙소인 석모도 자연휴양림에서
관리인에게 민머루 해변의 일몰을 추천받아 가는 늦은 오후,
석모도 미네랄 온천과 남해의 보리암, 양양의 낙산사와 더불어 3대 관음성지라는 낙가산 보문사를 지났습니다.
멀리 왼쪽의 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관음보살이 보입니다.
석모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강화도의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낙가산을 넘어 보문사에 왔었지요.
이제는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네요.
민머루 해변은 백사장의 길이가 약 1km, 탁 트인 해변에서 서해의 아름다운 석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서해 3대 일몰지의 하나답게
하늘도 바다도 모두 황금빛으로 물들인 장엄한 시간이었습니다.
휴양림은
숲 속의 집에서
바다와
산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가파른 언덕길, 계곡으로 이어진 데크로드를 따라 수목원에 들어가
참성단과 첨성대 모형을 보며 숲길을 걸었지요.
가을의 문턱입니다.
사방댐이 있는 정자에서 맞은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