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박경리, 김춘수와 김상옥, 전혁림과 윤이상 같은 예술가들이 나고 자랐으며 영면에 들어간 곳,
한려해상 국립공원 중심의 크고 작은 500여 개의 아름다운 섬과
삼도수군 통제영과 세병관, 충렬사와 제승당 등의 역사적인 유적지,
국제음악당에 남해안 별신굿, 승전무를 볼 수 있고
여러 가지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나전장과 소목장, 갓일 등 무형문화재에 각종 축제와 해산물이 풍성한 곳.
짧은 일정으로는 아쉬움만 남을 것 같아서 미루었던 곳, 통영에 왔습니다.
그러나 2박의 4일로도 해결되지 않아
한산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 여행은 다음으로 미루었네요.
전남 신안군 다음으로 섬이 많다는 통영의 볼거리, '통영 8경'은
1. 미륵산에서 보는 한려수도, 2. 통영운하 야경, 3.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 4. 달아 공원의 일몰,
5. 제승당 앞바다, 6. 남망산 조각공원, 7. 사량도 옥녀봉, 8. 연화도 용머리랍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미륵산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와 통영운하 야경, 제승당 앞바다까지 3경을 보았고
통영에 있는 내내 흐리고 비가 내려서 달아 공원의 일몰은 놓쳤습니다.
연육교와 섬과 섬을 잇는 다리들이 잇따라 건설되면서 지금은 섬 지역에 오고 가기가 좋아졌다지요.
멋진 드라이브 코스는 한산도 해안일주도로와 산양 관광일주도로까지 끝내면서
배를 타고 섬을 이어서 걷는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중 3~6번 길은 내년에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해발 0에서 시작하는 등산코스도 많습니다.
통영의 섬을 오가는 배(페리)는 대부분 구도심,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출도착하는데
혹 선착장이 다른 곳도 있으니 확인 필수, 선박 운항은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수가 많습니다.
운항 상황과 선표 예매 사이트는 ‘가고 싶은 섬’, http://island.haewoon.co.kr
통영 시내 지도에서
볼거리가 모여 있는 강구안 중심의 북쪽은 도보 관광(5시간 안팎)으로 충분하지만
미륵도 관광특구와 산양읍 주변의 남쪽은 차로 이동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전날 오후 도착.
다음날 아침에는 여객선 터미널 주변의 산책길을 걸었습니다.
충무대교 교각의 그림은
통영 출신 화가인 전혁림(1915~20010)의 작품, '통영항'이랍니다.
1983년, 미륵산을 배경으로 강구안의 건물과 정박한 선박들을 그린 유화인데
2006년, 단순한 이미지의 석판화 작업으로 재구성한 것을 2018년 9월, 김건우가 교각에 그려놓았다지요.
산책길에는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 일부를 새긴 글 비도 보입니다.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백 년 가게'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해안가의 '부일식당'에서 복국으로 점심 먹기.
정갈한 상차림이 좋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만 영업을 하기 때문에 엊저녁에는 그냥 돌아서야 했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통영 도심 탐험에 들어갑니다.
조선시대 통제영 소속 군선들이 정박했던 '병선마당'을 재현해 놓은 '한산대첩 광장'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 장군과 활을 쏘고 노를 젓는 병사 등 조선 수군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습니다.
그 옆에 관광안내센터가 있어서 자료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근처 이중섭이 살았던 집은 찾기 어려웠지요.
복잡한 항남동 거리에서 이 건물 앞,
표지석은 그냥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작았거든요.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피난시절인 1952년 봄부터 2년 동안 이 건물에 있던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 살면서 작품 활동에 하게 됩니다.
이때의 작품으로 ‘황소’,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등 30여 점의 유화를 남겼습니다.
예전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강구안의 문화마당은 다양한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지금은 공사 중.
이중섭의 '황소'와
'강구안 풍경' 동판은 각종 폐기물과 뒤섞여 빗속에서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휴지로 씻어내야 할 정도였지요.
1년 후에 완공된다니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큽니다.
‘동쪽에 있는 높은 절벽’, 동피랑의 벽화마을로 갑니다.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동피랑이 벽화마을로 시선을 끌게 된 것은
2007년 시민단체들이 벽화 그리기 공모전을 시작하면서부터랍니다.
그들은 중앙시장 뒤쪽 언덕의 이 허름한 동네가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벽화로 마을을 되살려내면서 또 하나의 관광상품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칠레의 발파라이소처럼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활기찬 벽화마을이 되었다네요.
주택가 담벼락을 장식한 벽화들이 예뻤습니다.
동피랑 정상에는 찻집, '나그네 쉼터'와 통제영의 동쪽 전망대인 동포루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멀리 서쪽의 서포루와 산 위에 있는 북포루가,
아래로는 강구안 동네가 보입니다.
충청, 경상, 전라의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본영, 삼도수군 통제영으로 들어갑니다.
세병문 또는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큰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불렀던 망일루로 올라가서
지과문을 지나면
세병관.
세병관은 객사 건물로 서울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목조건물.
당나라 두보의 시, ‘挽河洗兵’에서 현판 이름을 따왔답니다.
‘挽河洗兵’은 전쟁과 가난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두보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으면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시로
여기도 그런 염원을 현판에 담았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는 마음은 이 도시를 예술의 고장으로 만드는 동력이었겠지요.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의 막강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1872년의 고지도와
통영의 오밀조밀 소박한 예전 모습이 정겹습니다.
서피랑은 소설가 박경리(1926~2008)가 나고 자란 곳으로 수산업의 쇠퇴와 함께 내리막을 걷던 동네.
경관 조명이 조성되는 등의 재단장으로 또 하나의 명물이 되었답니다.
공원 산책로, 99 계단, 서포루 등의 볼거리에 공원 입구에는 박경리의 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 바닷빛의 맑고 푸르름을 자랑했던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던 강원도 원주에서 이제는 돌아와 미륵산 서쪽 자락에서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그냥 지나칠 만큼 작은 안내글이 붙은
붉은 벽돌집의 좁을 골목을 돌아 나오면
옆으로 가까이 통제영 건물이 보입니다.
통영에서 충무로, 다시 통영으로 이름이 바꾸면서 한산대첩의 자부심이 가득한 이 거리는
오수 파이프 뚜껑까지도 거북선이 조각되어 있는 이순신의 도시이고
나전 칠기의 문양을 동판으로 만들어 보도를 장식한, 나전장이 발달한 예술의 도시입니다.
박경리 생가에서 나와 중앙시장 쪽으로 걸어
청마 거리에 왔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과 '깃발' 등 그의 시들이 동판에 새겨져 보도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씨도 작고 거리의 비바람과 먼지 속에서 시 구절은 흐릿해져 존재감이 없었네요.
차리리 동판을 거리 건물 벽에 붙여 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통영 중앙우체국 앞에도
청마의 시비, '행복'이 보입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던 그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정운(시조시인 이영도)에게 20여 년 동안 5000여 통의 연서를 보냈습니다.
청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정운은 그 편지들을 모아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출판합니다.
우체국에서 보이는 앞쪽에 정운의 수예점이 있었다지요.
청마도 정운도 가도 없는 지금, 그 수예점은 '금옥당'이라는 이름의 보석 가게로 바뀌었고
그 가게 주인이 좋아하는 시인 듯 유치환의 '식목제'가 벽에 붙여 있었습니다.
골목 어귀에는 청마의 흉상과 그의 '향수' 시비가 있습니다.
거리거리, 골목골목에서 예술가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소풍날의 보물 찾기처럼 즐거운 날들입니다.